반도체 핵심소재 3개 품목 수출규제에 이어 일본이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산업계 전반에 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은 한달 전부터 비상상황에 대비했지만 2~3개월 후면 생산차질을 빚을 것이란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이미 일본발 악재로 타격을 입은 반도체 업계가 화이트리스트 배제조치로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달 규제가 시작된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뿐만 아니라 실리콘웨이퍼, 포토마스크도 안정적 확보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 등 경제5단체는 이날 성명을 통해 “일본 정부의 결정은 외교적 사안을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보복한 것”이라며 “세계 경제에도 심대한 피해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계는 준비한대로 수입 다변화, 재고 확보에 힘쓸 방침이다. 일부는 국산화도 시도 중이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기술이 없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IT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위상이 순식간에 시한부 상황에 놓이면서 “왜 우리는 핵심 소재를 만들지 못했나”라는 질책과 자조의 목소리도 터져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내 업체가 개발하고 양산한 소재가 단기일 안에 반도체 공정에서 기존 소재를 대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본이 반도체 산업의 근간인 글로벌 분업 체계를 깨뜨리자 비로소 우리도 ‘소재 국산화’에 나서야 할 필요성이 생긴 셈이다.
반도체는 수백 종류의 소재가 투입되는 기술의 집약체다. 문제는 핵심소재의 일본 의존도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18.2%, 소재 국산화율은 50.3%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 반도체 공정은 크게 전공정과 후공정으로 나뉜다. 전공정은 세정, 열처리, 노광, 식각, 증착, 이온 주입, 평판화 순으로 이뤄진다. 이 중 노광과 이온 주입에 필요한 소재·장비의 국산화율은 놀랍게도 0%다. 필수 공정의 국산화율 0%, 일본 의존율 90%가 반도체 강국인 한국의 현주소다.
소재만이 문제가 아니다. 기존 설비를 수리할 부품을 구하지 못하면 공장을 멈출 수도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 1~5월 누적 기준 일본에서 수입한 반도체 제조장비는 12억1200만달러로 전체 수입액의 33.8%에 달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장비 고장 등 긴급 상황에 대비해 부품을 구비해두지만 최악의 경우 설비가 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 업계보다 5~6년 늦게 출발… 정부·대기업 무관심이 성장 억제
반도체 소재와 부품의 국산화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중소기업이 불화수소를 만들 수 있는데 대기업이 안 사준다고 하더라”며 대기업 측에 책임을 돌렸다. 중소기업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국내 업계가 일본 재료업체 대비 5~6년 늦게 개발을 시작했고 이를 따라잡기 위해 국책 과제, 상공부 과제 등이 진행됐으나 반도체 기업의 무관심으로 더 이상의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부 역시 1990년대 이후 소재·부품 국산화에 나서면서 수요 대기업의 문제를 지적해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10년 부품소재 비전 계획을 발표하고, 연구개발 단계부터 대기업의 참여를 확대해 개발과 동시에 납품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수요 대기업들은 초기부터 써온 ‘검증된 소재’를 바꾸는 게 어렵다고 토로한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점점 복잡해지는데 ‘굳이’ 소재를 변경했다가 자칫 공정 전체가 헝클어질 수 있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국산 소재를 쓸 기업은 없다는 것이다. 반도체에 쓰이는 소재는 같은 소재여도 제조사별로 품질에 차이가 있고, 공정별로 필요한 혼합비도 다르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소재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사 공정에 맞는지 수개월의 테스트 과정도 필수적이며, 완제품으로 만들어졌을 때의 품질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수차례의 출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소재 변경은 분명 큰 부담이다.
일부 소재의 경우 개발과 양산에 성공한다고 해도 시장에서의 소비량이 적어 중소 업체는 개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필수 공정이라고 하지만 매우 소량만 사용되는데 업체 입장에서는 기술이 있어도 수익이 크지 않아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높은 품질을 보장하는 동시에 글로벌 시장에 판로를 구축한 업체가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반도체 산업이 고도화, 세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각국의 기업 사정에 맞는 글로벌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오랜 시간 쌓아온 일본의 독점적인 기술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또 전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가격경쟁력에서도 앞서야 한다. 특허 장벽도 걸림돌이다. 이홍배 동의대 무역·유통학부 교수는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공급망)이 형성돼 있는 구조에서 전 세계에서 제일 잘 만들어진 부품·소재를 가져다 쓰는 것이 산업의 기본”이라며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다 만들어 쓴다면 완제품의 가격이 너무 고가라서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일본의 규제 조치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작동해온 국제 분업체계에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특히 불안정한 동북아 정세와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 제3국에 의한 무역보복이 이뤄질 가능성이 상존하는 만큼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조철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은 “이번 사태로 특정 국가가 소재를 무기화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며 “단기적인 비효율이 발생하더라도 점차 의존도를 낮추고, 안정적인 소재와 부품 조달을 위해 국산화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국산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보호해주는 동시에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연구에 나서는 환경 조성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중소기업이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공정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여러 단계의 평가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상호 신뢰와 동반 성장이라는 선순환 구조가 자리 잡지 못하면 국산화는 요원하다. 중소기업을 키우려면 최대 10년 이상의 연구·개발(R&D)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부가 무게감 있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사무국장은 “반도체산업을 먼저 시작한 미·일·유럽은 반도체 제조기업과 장비·소재 업체들이 산업 조성기부터 함께 발전해온 반면, 한국은 제조 대기업이 급성장하면서 격차가 벌어지게 됐다”며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이끌고 보조를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성훈 최예슬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