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만든 안전 매뉴얼만 지켰다면 막을 수 있었다

입력 2019-08-02 04:04 수정 2019-08-02 13:13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31일 갑작스러운 폭우로 작업자들이 고립된 서울 양천구 목동 빗물 펌프장에서 사고발생 현황을 보고받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1일 빗물 저장을 위한 지하 터널 수문(水門)이 자동으로 열려 건설사 직원 3명이 사망한 서울 양천구 빗물저류배수시설 사고는 건설사와 서울시가 6년 전 만든 안전 매뉴얼만 잘 지켰다면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는 2013년 발생한 ‘노량진 수몰사고’ 이후 안전 매뉴얼과 대책을 연이어 내놨다. 당시 장마 기간 상수도관 공사가 강행됐고 강이 범람해 현장 근로자 7명이 사망했다. 전문가들은 이 사고를 계기로 만들어진 매뉴얼이 이번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1일 서울시에 따르면 사고가 발생한 유지관리수직구 근처에는 직원들의 안전 규정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감리자나 안전 관리자가 없었다. 서울시는 노량진 수몰사고 이후 ‘공사장 안전사고 재발방지 대책’을 내놓고 밀폐 작업 공간에 감시인(감리자 또는 안전관리자)을 배치하고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했는데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전날 현대건설 협력업체 직원 2명은 오전 7시10분에 지하 터널로 내려갔고 사고는 오전 8시9분쯤 발생했지만 감리업체 직원들은 오전 9시에 출근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계약상 감리업체 직원 근무 시간이 8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보니 생긴 상황”이라며 “감리자가 없을 때 이뤄지는 작업에 대해선 감리업체에 사전 보고하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현대건설 측은 오전 7시 작업 내용을 감리업체에 사전 보고했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안전 관리자도 사건 장소 인근에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고가 발생한 유지관리수직구는 사실상 공사가 어느 정도 완료되고 시운전하던 중이었다. 안전관리자는 공사 진행 예정인 다른 장소 근처에서 안전수칙 준수 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지관리수직구는 공사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동식 긴급 알림벨 등 안전시설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빗물저류배수시설을 담당하는 도시기반시설본부는 돌발 강우 시 작업 관련 안전 매뉴얼의 존재도 잘 모르고 있었다.

조원철 연세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매번 사고 발생 이후 지자체와 당국은 매뉴얼과 대책을 내놓지만 이후 제대로 관리를 못한다”며 “이번 사고 역시 매뉴얼만 지켰다면 막을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사고 현장에서는 이날 오전 5시42분과 47분쯤 현대건설 직원 안모(30)씨와 협력업체의 20대 미얀마 국적 A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안씨는 결혼한 지 1년이 된 신혼이어서 주위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는 지하에 들어간 동료 두 명에게 호우 소식을 알리기 위해 터널로 내려갔다. 외삼촌 고모씨는 “책임감이 강해 들어간 것 같다”며 “통신 장치도 없이 사지로 몰아넣은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A씨의 동료 쏘맹언(32)씨는 “A씨는 두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 6명의 형제 자매를 미얀마에 두고 홀로 한국에 와 일했다. 월급 중 용돈 조금을 제외하고 꼬박꼬박 집으로 보내던 성실한 친구”라며 눈물을 훔쳤다. A씨의 시신은 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질 예정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현장을 찾아 “서울시는 경찰 조사 후 감사를 실시해 책임 소재를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며 “서울시, 양천구, 현대건설이 유가족의 피해에 책임을 다하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2일까지인 휴가를 취소했다. 서울 양천경찰서는 전담팀을 꾸리고 현대건설과 협력업체 직원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안규영 박구인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