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옛 풍경 간직… 초심으로 출렁이는 부흥 물결

입력 2019-08-05 21:01 수정 2019-08-06 17:34
남경산기도원은 내장산 남창 코스 등산로 초입에 위치한다. 가을이면 입구엔 등산객들로 북적인다.

기도원 기도는 누가 뭐래도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밤샘 기도, 금식 기도, 산 기도를 하는 모습은 흔한 기도원 풍경이었다. 1990년대 초반까진 그랬다. 기도원의 쇠락은 통계를 찾아볼 것도 없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기도원에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제였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것이다.

본지는 8월 기도원 기행지로 남경산기도원(김대성 원장 전라남도 장성)을 선정했다. ‘기도원 운동’을 펼치는 김대성 목사(소명중앙교회)가 원장으로 있는 곳이다. 김 목사는 남경산기도원뿐 아니라, 아름다운기도원(충청남도 대전), 큰십자가기도원(경상남도 산청)을 운영한다. 그는 기도가 살아야 한국교회가 산다고 말한다. 기도원 불씨가 꺼진 지 오래인 현재, 그가 기도원 운동에 매달리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이른 아침, 서둘러 집을 나섰다. 서울에서 남경산기도원까지는 가는 길이 멀다. 영등포역에서 백양사역행 기차표를 구입했다. 왕복 3만 9,000원. 정말 오랜만에 타는 무궁화호였다.

승객이 직접 싸온 도시락이나 김밥 등을 펼쳐놓고 먹을 수 있는 식당 칸으로 이동했다. 좌석보다 널찍한 이곳이 편하게 느껴져 백양사역에 도착할 때까지 4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사람 구경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긴 의자에 드러누운 할머니들, 산으로 놀러가는 등산객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먹으러 온 아이들로 식당 칸은 늘 붐볐다.

창밖으로 간간이 보이던 높은 건물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백양사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내리는 사람이 열 명도 안 돼 보였다. 역사는 작고 아담했다. 대기실에는 꾸벅꾸벅 조는 할머니와 휴대전화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젊은이, 둘뿐이었다. 백양사역은 가을이면 내장산 가는 등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지금으로선 그 광경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기도원에 전화를 넣었다. 대기실에 앉아 10분쯤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남경산기도원’이란 스티커를 붙인 승합차가 역사로 들어왔다. 승합차를 몰고 온 사람은 기도원 목사였다. 기도원은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을 위해 셔틀을 운행한다.

짧은 인사와 함께 하루에 몇 번이나 기도원과 역 사이를 오가느냐고 물었다. 기도원 목사는 말수가 적고,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글쎄요, 세어보진 못했는데요. 혼자서 기차나 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이 꽤 많아요. 8월 되면 하루에 400명 정도 와요.” 속으로 셈했다. 한번에 10명씩 태우더라도 40번을 오가야 한다.

기도원은 몽계폭포 능선사거리 운문암 백양사로 이어지는 ‘내장산 남창 코스’ 초입에 있었다. 기도원 목사가 말했다. “전에는 따로 등산로가 없었어요. 기도원을 통해 내장산에 들어갔지요. 등산로가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됐어요.” 가을 내장산은 단풍잎보다 등산객 수가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창인 가을을 준비하는지 아직은 한가한 편이다.

옛날 산속 기도원 모습 그대로였다. 예배당, 사무실, 기도실, 숙소가 각각 자리 잡은 4개의 낡은 목조 건물이 내장산으로 들어가는 옛 등산로를 끼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예배당 건물 지붕은 물이 샜는지, 철제 슬레이트로 덧대었다. 마당 빨랫줄에는 기도실 방석과 숙소 이불이 걸려있었다. 요새 지어진 유명 수련원들보다 낡았지만, 그래서 더 기도원다워 보였다.

기자가 기도원에 방문한 날은, 태풍 다나스가 한반도 남부 지방을 막 휩쓸고 간 다음 날이었다(태풍이 한반도를 벗어난 날은 7월 21일이고, 취재는 22일이었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계곡 근처에서는 대화 나누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태풍이 얼마나 많은 비를 뿌리고 갔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계곡의 소음으로부터 달아나 기도원 뒷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산 기도 소리였다.

바위 위에 올라앉아 산기도 드리는 성도들.

중년의 세 남녀가 널찍한 바위 위에 올라앉아, 방언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위와 나무와 흙바닥에 온몸을 부대끼며 기도했다. 때마침 기도원에 도착한 김대성 목사가 바위 이름을 알려주었다. “능력(能力) 바위라고 불러요. 바위에 능력 있다는 말은 아니고요. 그냥 바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서울서 출발한 지 6시간 만에 김 목사를 만났다. 키가 작았지만, 풍채가 좋았다. 눈은 웃는 모양이었고, 목소리는 걸걸했다.

집회 전 김 목사는 기도원에 자주 오는 몇몇과 반갑게 인사했다. 기도원을 둘러보다 우연히 만난 허영도 목사(목포 평안교회 부목사 38)가 일러주었다. “종종 교인들과 3박 4일, 4박 5일씩 남경산기도원을 찾아요. 내장산을 끼고 있으니 풍경도 좋고, 말씀도 좋고, 교인들이 참 좋아해요. 또 여기는 식사비를 받지 않아서 저렴하거든요. 이런 곳이 없죠.”

기도원은 기도자들에게 무료로 밥을 제공했다. 방값은 몇 명이 같이 자든 에어컨 있는 방은 2만 원, 에어컨 없는 방은 1만 원이다. 예배당이나 기도원이 마련한 천막에서 자는 것은 무료다. 숙박비를 내지 않아도 식사는 무료다. 김 목사가 덧붙였다. “처음에는 방값도 받지 않았어요. 기도하러 오는 사람한테 무슨 돈을 받아요. 돈 없어서 기도 못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다툼이 나더라고요. 서로 에어컨 있는 방을 달라고. 2만 원, 1만 원 차등을 둔 건 어쩔 수 없었죠. 사실 방값 받는다고 큰 도움이 되진 않아요.”

기도원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남경산기도원 집회 시간은 ▲새벽 5시 30분 ▲오전 10시 30분 ▲오후 3시 ▲밤 7시 30분, 하루 네 번이다. 기도자들은 기도실에서 예배당에서 숙소에서 산속에서 각자 흩어져서 기도하다, 집회 시간이 되자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기도원에 온 모든 사람이 한눈에 들어왔다. 50명 쯤 돼 보였다. 평일치곤 기도원에 온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식 중인지 식사 시간에는 못 봤던 얼굴도 많이 보인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4명과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굳이 혼자 힘으로 예배당 앞자리까지 기어가 앉았다.

기자는 다른 기도자들과 함께 김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한국교회가 왜 망해가는 줄 아세요? 목사들이 세미나나 다니고, 공부한답시고 박사 따러 다니고, 방법과 지식으로 목회하려고 해서 그래요. 성도들도 마찬가지예요. 기도를 하지 않아요. 목회하다 문제 생기면, 집안에 문제 생기면, 세미나 가요? 공부하러 대학원 가요? 기도하러 가야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해요.”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아멘”을 외쳤다. 기자도 “아멘”을 외쳤다. 태풍의 잔흔 때문인지 예배당은 습했다. 대형 에어컨과 선풍기 수십 대를 돌렸지만, 소용없었다. 양말과 바지가 금세 흠뻑 젖었다. 젖은 채로 두 시간을 꼬박 앉아 기도했다. 묘한 해방감을, 희열을 느꼈다. 이곳에선 있는 힘껏 소리 내서 찬양하고, 기도해도 흉이 아니었다. 어릴 적 기도원에서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기도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