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권민정] 시간을 잃어버린 소녀들

입력 2019-08-02 04:04 수정 2019-09-09 17:21

8월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보리라.” 시인 박두진은 광복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다. 고통 속에서 고국을 떠났던 사람들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운 가족과 조상의 선영이 있는 땅으로. 그러나 돌아올 수 없었던, 돌아와서도 결코 환대 받지 못했던 우리의 가엾은 딸들이 있었다. 강제로, 혹은 속아서 끌려갔던 어린 소녀들, 일본군의 성노예 ‘위안부’들이었다.

그들은 50년 동안 침묵 속에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군위안부 피해자들은 가문의 수치, 민족의 수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였던 그들은 할머니가 되었다. 결코 말할 수 없었던, 그러나 가슴 속에 응어리진 그 한을 풀 길 없어 혼자서만 몸부림치던 그들이 드디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발언, 그것은 차라리 비명이었다. 군위안부, 처음에는 간호사나 공원으로 일하면 많은 돈을 벌어 가난한 집안을 잘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감언이설로 속여, 나중에는 마구잡이 납치까지, 일본 정부의 묵인 하에 자행된 군부의 만행이었다. 패망한 일본군들은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기 위해 그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고 했다. 군위안부 중 살아남은 이가 얼마나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천신만고 끝에 살아났더라도 숨죽이고 살던 그들이 김학순 할머니의 발언 이후 한국에서, 중국에서, 세계의 각처에서 봇물 터지듯 증언을 쏟아내며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다.

“그들은 나의 젊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빼앗았습니다. 전쟁 후에 나는 영국 육군 경찰에 이것을 고발했지만 아무 조처가 없었습니다. 확실히 발언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까지 많은 해가 걸렸습니다. 나는 끔찍한 수치와 불결함 속에서 침묵하며 살았어요.” 네덜란드인 얀 뤼프 오헤르너는 인도네시아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 일본군 성노예 시설로 보내져 군위안부가 되었다. 50년 동안 소리 없이 울던 그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난 후라고 했다.

8월 14일은 아시아연대회의가 정한 ‘세계일본군위안부기림일’이다. 우리나라는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가장 무서운 본질은 희생자가 살해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존재 자체의 기록과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망각의 구멍으로 떨어져 말살되는 것이라고 했다. 기억에 대한 이런 통찰은 똑같이 군위안부에게도 적용된다.

홀로코스트가 세계인의 가슴에 새긴 것은 학살의 잔혹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계의 양심과 감성을 흔들고 울린 것은 시와 소설, 에세이, 특히 영화였다. 다행스럽게 군위안부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다큐 ‘낮은 목소리’를 시작으로 ‘귀향’ ‘아이 캔 스피크’ 등의 극영화는 많은 이의 감성을 울렸다. 상영 중인 ‘주전장’은 제3자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세계인에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양심적인 일본인 사진작가 이토 다카시의 글과 사진집 ‘기억하겠습니다’, 서울대 인권센터에서 나온 사진과 자료로 보는 피해 여성들의 기록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등과 같은 자료들이 더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다 그만 시간을 잃어버리셨죠/ 다시 찾아드릴게요/ 어머니 열 네 살 소녀 그 어린 꿈들 이 땅에 흐르는 대지의 눈물이여.” CCM가수 홍순관은 ‘대지의 눈물’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지극히 작은 자의 슬픔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서 54장 4절)라고 말씀하신다. 동대문교회 집사였던 김학순 할머니는 그 견디기 힘들었던 긴 시간을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로 위로 받으며 살아내셨고, 또 용기도 얻었을 것이다.

권민정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