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 보복을 둘러싼 갈등 사태를 겪으면서 새로 알게 된 것들이 적지 않다. 우선 초일류기업이라는 삼성전자가 의외로 취약한 기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관리의 삼성’도 관리하지 못하는 게 많았다. 부품·소재 납품 시스템의 이원화를 넘어 오원화까지 대비해놓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거나, 삼성도 어쩌지 못하는 부품·소재가 여전히 많은 것이다.
연간 5000억원 정도의 몇 가지 부품·소재 때문에 한국 경제가 통째로 휘청거릴 수 있다는 점도 확인했다.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그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북핵 리스크에만 매몰돼 있다 보니, 다른 일로 한국이 충격을 받을 가능성에 대해선 진지하게 대비하지 못해온 게 사실이다. 마치 YG엔터테인먼트가 생각하지도 못한 취객 폭행 사건으로 위기를 맞은 것처럼, 한국도 보다 다양한 미래 위기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아베 신조 정권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경제 보복 조치가 일본에 파견된 숱한 외교관들과 국가정보원 직원들, 일본 주재 기업인들, 또 한국에서 일본 대사관을 접촉하는 이들까지 모두들 새카맣게 모르게 취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수십년 해왔다는 의원외교도 큰 도움이 못 됐고 막판에야 방일단을 구성해 ‘흉내’만 냈을 뿐이다. 다들 해외에 나가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일부 정부 인사들은 일본의 보복 가능성에 대해 오래전부터 롱리스트를 예상해 왔다지만, 그럼 왜 미리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호들갑을 떠는 걸까.
그동안 졸속 추가경정예산을 많이 봐오긴 했지만, 이번 경제 보복 추경처럼 구체적 계획도 없이 수천억원짜리 추경이 하루아침에 추진되는 건 처음 봤다.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2700억원으로 줄여놔서 그렇지, 원래 각 상임위 차원에서 올라온 보복 대응 추경이 8000억원 수준이었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역사에 남을 졸속 추경이 될까 우려된다.
어려울 때 도와줄 마땅한 이웃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혈맹이라는 미국이 이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특히 그렇다. 오히려 한·일 갈등 와중에 터진 독도 영공 침범 사태에서 러시아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계속 말해주는 게 영유권을 더 공고히 해주는 효과가 생긴다는 것도 처음 깨달았다.
문재인정부 청와대가 ‘보도가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언론을 마구 때리는 모습도 처음 목도했다. 국익의 기준은 무엇인가. 가령 독재자한테 국익과 민주화운동가한테 국익이 같을 수 있는가. 일본 여행 보이콧 운동 와중에 ‘갈치조림 6만원, 닭백숙 20만원… 국내여행은 돈 벌면 갈게요’라는 보도는 매국 보도인가. 일본과 한창 힘들게 싸울 때 한 방송이 자칫 중국을 또 자극할 수 있는 ‘1년 만에 사드 기지 공사 재개’를 단독보도한 것 역시 매국 보도인가. 국익 보도를 내세운 건 보편적 권리를 폭넓게 인정하려 애써온 현 정부답지 않은 촌스러운 대응이었다.
한·일 갈등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이 전면에 나서 휘젓고 다녀도 괜찮구나 하는 것도 새삼 알게 됐다. 조국 전 수석은 기존에 묵묵히 일하는 참모의 역할에 충실했던 청와대 수석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했다. 오버한 것도 같고,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한 것도 같은데 여하간 유사 이래 최고의 ‘광대 수석’이었다. 아니면 ‘일하는 방식의 혁명’으로 불러야 할까.
끝으로 국민들 사이에 ‘아베 트라우마’가 상당히 크다는 점을 날마다 느낀다. 마침 휴가철이고 맥주를 많이 마시는 계절이라 일본 불매 운동의 효과가 더 커 보이기도 하지만, 일본과 갈등을 봉합하더라도 ‘마음속 보이콧’이 10년은 더 갈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 이들이 많다. 한국인의 인식에 꽤 오랫동안 ‘NO 재팬’이 뉴노멀로 자리 잡을 것이다. 국민에게 이런 트라우마를 안기고, 보이콧 전선에 뛰어들게 한 양국 지도자들의 잘못이 크다.
손병호 정치부장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