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해묵은 개혁 과제 중 하나는 상고심(3심) 제도 개선이다. 상고사건 폭증으로 인한 제도 개선의 역사는 대법원에 일반판사 배치를 시도한 1959년 법원조직법 개정 이래 60년째 이어지고 있다. 사법부는 긴 세월 수차례 개혁에 나섰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때문에 상고제도 개선은 늘 역대 대법원장들의 피할 수 없는 숙제였다.
근래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2011~2017년 재임)이 숙원 사업인 상고법원 제도 도입을 위해 청와대·국회를 움직이는 데 사법부 역량을 쏟았다. 하지만 결국 탈이 나 구속 기소되는 헌정사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심 제도 개선을 이끌던 중에도 상고심 본안사건 접수건은 매년 급증했다. 2008년 2만8040건에서 10년 뒤인 지난해 4만7979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산술적으로는 대법관 1명(법원행정처장 제외 13명)이 1년에 3690건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후임인 김명수 대법원장으로서는 전임자의 실패를 좇지 않으면서도 상고심 제도를 더 이상 지금처럼 방치해선 안 된다는 까다로운 과제를 받아든 셈이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 전부터 자신의 과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2017년 9월 13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지금 우리 법원이 처해 있는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상고심 제도 개선”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지난 대법원장님 때도 상고제도에 관해 논란을 빚다 상고법원 제도(설치 법안)가 결국 폐기돼 있는 상황이지만 저는 다시 한번 하겠다”고 말했다. 상고법원의 그림자가 아직 어른거리는 상황 속에서도 전임자가 못 넘은 관문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김 대법원장의 상고심 개혁 프로젝트는 재임 2년이 가깝도록 출발점에 머물러 있다. 법원행정처는 지난달 2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법학자들과 상고제도 개편 간담회를 개최하면서 “대법원장이 상고제도 개편방안 논의를 주재한 최초의 자리”라고 설명했다. 김 대법원장이 취임(2017년 9월 26일) 이후 2년이 다 돼가는 시점에서야 처음 공식적인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대법원의 속내는 복잡하다. 대외적으로는 “사회 각계의 의견을 두루 수렴하겠다”고 말하지만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해법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전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에 ‘올인’했다면 현 대법원장은 ‘상고허가제’에 기울어 있다. 김 대법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상고허가제는 한 번 실시했다가 부작용으로 폐지돼 다시 꺼내 들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고, ‘고등법원 상고부’ 역시 한때 실시를 했다가 그만둔 부분이 있다”며 “지난 사법부의 상고법원 제도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폐기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중에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상고허가제”라고 밝혔다.
문제는 전 사법부가 무리하면서 ‘사달’이 난 전력 때문에 현 사법부의 운신 폭까지 좁아졌다는 점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전 사법부처럼 주도적으로 나서기에는 제약 조건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김 대법원장이 밀고 있는 상고허가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81년 3월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 진압한 신군부가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을 제정해 상고 이유를 대폭 제한하고 허가한 경우에만 상고심을 여는 식으로 상고사건의 폭증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대법원에 올릴 사건을 경중을 가려 정할 수 있었고 상고허가신청 기각 결정을 내리면서 이유를 적지 않아도 됐다. 대법원에는 효율적인 제도였지만 사건 당사자들의 불만은 점차 높아졌다. 상고허가제는 “세 번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여론의 비판 끝에 90년 9월 폐지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대법원은 92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대책으로 제시된 건 상고허가제 부활, 고등법원 상고부 설치 등이 있었다. 이 중 간단한 상고사건은 고등법원 특별상고부에서 심리하고 대법원은 재상고 사건만 선별 처리하는 고등법원 상고부 제도는 61년 8월 도입됐었다. 하지만 여러 고등법원에서 상고심이 이뤄져 비슷한 사건에 대한 법령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 모든 국민에게 대법원 판결을 받을 기회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 등의 이유로 제도 시행 2년 만인 63년 12월 폐지됐다. 대법원은 검토 끝에 상고허가제 부활 카드를 다시 꺼냈지만 대한변호사협회 등의 강력한 반대로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다음 제시된 대안 중 하나는 심리불속행 제도였다. 94년 9월 심리불속행 제도를 규정한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이 시행됐다. 법률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상고는 심리를 진행하지 않고 기각하되 이유를 생략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심리불속행 사건의 당사자들이 기각 사유를 알 수 없어 불만이 커져 갔다. 심리불속행 결정을 위해서는 어차피 사건기록을 다 읽어봐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업무 경감 효과가 없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논란이 된 상고법원 역시 한때 주요한 대안으로 제시됐다. 대법원 이외 상고심을 맡는 전담 법원을 만들어 3심 재판을 받기 원하는 국민들의 욕구를 채우는 동시에 재판 효율성도 높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대법원 재판을 받고 싶은 국민들의 욕구에 거스른다는 지적이 나왔다. 상고법원에 불복해 대법원까지 갈 경우 3심제가 아닌 4심제가 돼 소송기간·비용이 오히려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도 컸다. 상고법원 제도는 2014년 당시 홍일표 새누리당 의원의 대표법안으로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또 다른 대안으로는 대법관 증원론이 있다. 사건 수가 많으면 대법관 수도 늘리면 된다는 손쉬운 해법이다. 대한변협이 꾸준히 요구해온 방안이다. 실제 지난해 7월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현재 14명인 대법관을 26명으로 대폭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현재보다 대법관 수를 늘릴 경우 전원합의체에서 실질적인 토론이 불가능해질 수 있고, 대법관 수를 늘려도 상고 사건이 계속 증가할 경우 미봉책에 그친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현 사법부의 상고심 제도 개선 행보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다. 법조계에서는 김 대법원장이 남은 임기 4년 동안 상고심 제도 개혁에 주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법원 관계자는 “(상고심 제도 개선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거나 추진방향이 잡힌 것은 없다”며 “이번 간담회를 시작으로 국민 지지와 동의를 받을 수 있는 방안이 뭔지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