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병원 인공신장실에서 일하는 8년 차 간호사입니다. 고향은 경남 함양군 산골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숨을 쉬지 않아 큰오빠가 어떤 약을 구해 먹였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탓에 온갖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집안에 성주단지를 가져다 놓고 복 달라, 명 달라 하며 빌었습니다.
어머니가 밤낮으로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1989년 중학교 3학년 때부턴 몸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변이 잘 나오지 않고 온몸이 퉁퉁 붓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병원에 가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저의 딱한 사정을 알고 도움을 줘서 겨우 진료를 받았습니다. 병원에서는 만성신부전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습니다. 아니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당장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가정형편에 치료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지금은 의료제도가 좋아져 치료가 수월하지만 30년 전만 해도 만성 콩팥병은 부자병이라고 할 만큼 치료에 큰 비용이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제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망연자실했습니다. 민간요법으로라도 치료해 보려 했지만, 병은 점점 악화됐습니다. 저는 힘든 중학교 3학년을 보내고 겨우 졸업했습니다. 집에서 1년을 쉬고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홍예숙 사모님을 만난 건 91년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당시 홍 사모님은 오창균 목사님과 결혼하기 전으로 부친이 담임하시던 함양 반석성결교회의 사역을 돕고 계셨습니다.
제 자취방은 교회 앞이었습니다. 자취방 주인아주머니께서 아픈 저를 보시고 “반석성결교회에 가면 아픈 사람들이 치료도 받고 불치병도 낫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교회로 갔습니다.
홍 사모님은 저를 안수하시더니 신장이 다 망가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녀오면 교회에 들러 매일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학교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소변이 잘 나오지 않으니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습니다. 복수도 차서 임산부가 아닌가 하는 오해도 받았습니다. 얼굴을 비롯해 온몸이 항상 퉁퉁 부어서 눈은 반쯤 감긴 상태였습니다. 늘 힘이 없었고 학교에 갔다 오면 다리가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 움직이기도 힘들었습니다.
사모님께서는 제 영혼과 육체의 생활을 철저히 책임져 주셨습니다. 먹는 것부터 복수가 찬 배를 최대한 옷으로 가릴 방법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의학적 지식이 없다 보니 여름철 제가 좋아하는 수박을 실컷 먹고 죽을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소변이 잘 안 나오니 수분 관리는 필수다. 생야채, 생과일은 극히 조심해야 하고 싱겁게 먹어야 한다.” 사모님은 매번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가르쳐 주시며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이 말은 제가 지금 환자들에게 교육하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사모님은 안수기도 외에 저의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손수 챙겨주심으로 영적 어머니뿐 아니라 육신의 어머니 몫까지 사랑으로 감당해주셨습니다. 안수로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자 저는 교회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습니다. 죽어가는 저 같은 자를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사모님의 헌신적인 안수로 드디어 콩팥 기능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깊이 알게 됐습니다. 저는 간호사가 돼 인공신장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환자분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들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은 결혼 13년 차로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과 귀한 선물인 남매와 함께 서울 대망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오 목사님의 설교 말씀으로 기복신앙 대신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달으며 믿음의 성장도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꺼져가는 제 인생에 찾아와 주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저를 새롭게 빚어주신 하나님을 생명 다해 사랑하며 전하고자 합니다.
정리=백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