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의구심, 미국의 배신감… 세기의 무역전쟁 불붙이다

입력 2019-08-03 04:04
사진=게티이미지

1970년 10월 1일 당시 마오쩌둥 중국 주석은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인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를 초청해 함께 천안문 망루에 섰다. 그리고 그를 통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1969년 국경지역에서 군사충돌을 빚는 등 소련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적대국인 미국에 손을 내민 것이다. 냉전 종식을 고대하던 미국도 소련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미·중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71년 4월 ‘핑퐁 외교’가 시작됐고, 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79년에는 미·중이 수교했다.

미국은 이후 중국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련이라는 사나운 곰을 막으려고 다소 약해 보이는 호랑이 새끼를 키우기 시작한 셈이다.

미국 허드슨연구소 중국전략센터장 마이클 필즈버리는 ‘백년의 마라톤’에서 미국이 중국을 어떻게 지원했는지 설명했다. 1979년 1월 덩샤오핑의 첫 미국 방문 때 양국은 과학교류 확대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해 중국 학생 50명이 처음 미국으로 갔고, 이후 5년간 1만9000명의 중국 학생이 미국 대학에서 물리학과 보건과학, 공학 등을 공부했다. 미국이 제공한 과학기술 지식은 사상 유례없는 규모였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미 국방부는 중국에 육해공 전략기술과 미사일 기술을 판매했다. 중국군은 세계적 수준의 전투력을 갖추게 됐다. 이듬해 중국의 군사용·비군사용 핵 프로그램 발전을 지원하는 내용의 국가안보결정지침 12호에 레이건이 서명했다.

레이건 정부는 1986년 중국이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슈퍼컴퓨터, 우주기술, 인공지능, 지능형 로봇 분야 등의 국가연구센터 8곳을 설립하도록 자금과 교육을 제공했다. 1985년에는 중국의 육해공군뿐 아니라 해병대의 공격력을 강화하는 10억 달러 규모의 무기 시스템을 판매하기로 했다.

미국은 1970년대까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던 중국을 발전시키면 중국 스스로 구체제를 벗어던지고 자유시장경제 및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할 것이라 기대했다.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 시장에 대한 욕심도 작용했다. 자칫 괴물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는 뒷전으로 밀렸다. 덩샤오핑은 ‘인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상관없다’거나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며 서방의 기대를 부풀게 했다.

하지만 중국은 경제성장을 하면서도 미국의 뜻대로 변화하지 않았다. 중국은 공산당 1당 독재와 국가 주도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고수했다. 중국에선 1980년대 초부터 미국의 생활방식과 문화가 ‘정신적 오염’이란 시각이 확산됐다. 이는 1989년 민주주의 요구를 짓밟은 천안문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중국은 세계 최강 패권국인 미국을 적으로 여겼다. 미국이 말라카 해협의 원유수송로를 차단할 수 있고 대만과 티베트, 신장위구르 지역의 분리주의자와 반정부 세력을 지원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미국이 일본-대만-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제1열도선’으로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봉쇄 정책을 펼친 것도 자극하는 요인이었다. 아편전쟁으로 서구에 유린당한 치욕의 역사를 가진 중국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인식이다. 그러나 중국은 속내를 숨기고 저자세로 미국의 도움과 배려를 받으며 급속한 경제성장과 군사력 증강을 이뤄냈다.

중국은 한편에서 미국의 적들과 손을 잡는 전략도 꾸준히 구사했다. “적이 반대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보호해야 하고, 적이 보호하는 것은 우리가 반대한다(凡是敵人反對的, 我們都要擁護, 凡是敵人擁護的, 我們都要反對).” 마오쩌둥 어록에 있는 얘기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일 때 중국이 탈레반과 이라크 사담후세인 정권을 지원한다고 의심했다. 반대로 중국은 최근 미국과 갈등을 빚는 이란과 베네수엘라를 옹호하고, 미국의 장악력이 느슨해진 아프리카 국가들을 적극 공략했다. 중국은 상하이협력기구와 브릭스(BRICS)에도 공을 들이며 세력을 키우고 있다.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상 역시 미국의 봉쇄를 뚫고 역으로 포위하는 전략이라고 미국은 의심한다.

시진핑 국가주석 체제 이후 중국은 몰래 힘을 키운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 기조를 버리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중국몽(中國夢) 실현을 선언했다. 전 세계 GDP의 30%를 차지했던 청나라 전성기를 다시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2050년까지 미국을 뛰어넘는 세계 최강 군대의 육성 목표도 제시했다.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패권 지위에 공식 도전장을 낸 셈이다. 그러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배신감과 위기감이 동시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불편한 속내는 지난해 10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허드슨연구소 연설에 모두 담겨 있다.

“미국 대학은 중국의 엔지니어, 경영자, 학자, 관료들을 교육시켰다. 소련 붕괴 후 중국에도 자유화 바람이 불 것이란 낙관에 취해 미국 시장을 중국에 개방하고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켰다. 미국은 중국에서 경제적·정치적 자유가 확대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구호는 속빈 강정일 뿐이었다.”

펜스 부통령은 중국의 환율조작, 지식재산권 절도, ‘중국제조 2025’ 야심, 남중국해 인공섬 군사기지화, 국민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 종교탄압, 일대일로 부채외교 등 중국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또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중국의 사전검열, 중국 합작사에 대한 공산당 조직 설치 의무화, 미국 대학 내 중국 유학생·학자 조직화 등을 비판했다. 그의 연설은 중국과 싸워야 하는 이유를 모두 적시한 ‘백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역전쟁이 시작된 이후 미국은 25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최고 25% 관세를 부과하고, 화웨이 제재와 중국인에 대한 비자심사 강화 등 전방위 공세를 펼치고 있다. 중국은 초기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분위기였으나 지난 5월 초 미국이 지식재산권 보호와 구조개혁, 국가보조금 철폐 등을 보장하는 법 개정을 요구하자 협상의 판을 깼다. 구조개혁에 대한 문서화 요구는 중국의 근간인 체제를 건드리는 문제여서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미·중 무역전쟁은 서로의 체제를 어떻게 수호하느냐는 성격의 전쟁인 셈이다. 단순히 관세 부과나 농산물 수입, 무역 불균형 문제가 합의된다고 해서 끝날 싸움이 아니라는 얘기다. 길은 세 가지다. 중국이 무역전쟁에서 완패해 미국의 요구대로 체제 변화를 하거나, 중국이 미국을 누르고 세계 질서의 패권자가 되거나, 아니면 전 세계가 체제와 각종 표준에서 미국과 중국 식의 두 가지 질서가 양립하는 경우다. 현재로선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