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종묵] 전쟁 없는 난리

입력 2019-07-31 04:01

요즘 20세기 전후한 시기의 글을 읽고 있다. 그 시절의 고민 중에 지금도 절실한 것이 제법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의 ‘삼전론(三戰論)’이 그러하다. 의암은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공주에서 2차에 걸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동학의 세가 크게 위축되자 1902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삼전론을 지어 국내의 동학교도에게 보이는 한편, 같은 해 8월 이 글을 의정대신 윤용선(尹容善)에게 보냈다.

의암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일본에서 국제정세를 살피고, ‘무병지란(無兵之亂)’ 곧 전쟁 없는 난리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았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각축하는 ‘무병지란’의 시대,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암은 조선이 무기로 싸우는 ‘병전(兵戰)’은 할 수 없는 전쟁으로 판단하고, 할 만한 전쟁으로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 세 가지를 통해 조선이 문명국으로 진보하여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이 세 가지 전쟁은 이러하다.

첫째, ‘도전’은 도덕의 전쟁이다. 의암은 맹자(孟子)가 이른 “천시(天時)는 지리(地理)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는 말과 서경(書經)에서 이른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라는 말을 인용하고 “도 앞에는 적이 없다(道前無敵)”고 했다. 그리고 “정벌이 미치는 곳에는 억만 명이 있더라도 각자 억만 가지 마음을 가지게 되지만, 도덕이 미치는 곳에는 열 집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 사람의 충심이라 하더라도 마음과 덕을 함께 하여 나라를 보필할 방책을 낼 것이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 했다. 의암은 무력이 아닌 덕 혹은 도덕으로 백성을 보듬어야 하고, 이를 통한 인화가 ‘전쟁 없는 난리’를 극복할 수 있는 첫 번째 방책이라 했다. 지금 우리의 인화는 어떠한가?

둘째, ‘재전’은 경제의 전쟁이다. 의암은 전통적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 논리에서 ‘사’는 아예 언급하지 않고 농업과 공업, 상업 이 세 가지가 고금의 아름다운 법규라 주장하고, “지모가 있는 인사들은 뜻을 같이 하여, 위로는 국왕의 자제로부터 아래로 일반 백성 가운데 뛰어난 자에 이르기까지 그 재주를 기르고 그 기술을 익히게 하여, 한편으로는 외침을 막는 방책임을 깨닫고, 한편으로는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술책으로 삼는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기술력이 국방과 부국의 방책이라 본 것이다. 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의 기술은 어떠한가?

셋째, ‘언전’은 언어의 전쟁이다. 의암이 이른 언어는 개인이 아닌 국가 차원의 것이다. 논어(論語)에서 이른 “한 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一言可以興邦)”라 한 대로 외교에서 언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외교에서 담판하는 법이 있다고 하면서 “대등한 상대가 버티고 있어 결판이 나지 않았을 때는 멀고 가까운 나라가 한데 모여 일의 옳고 그름을 먼저 조사하고, 경위의 가부를 살피고 따져서 사리로 마땅히 이야기할 만한 것을 찾아낸 뒤에 모든 일이 하나로 귀착되어, 승부의 목적을 확정하고 마침내 함께하는 규범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만약 반 푼어치의 경위라도 지모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 세계에 우뚝 서는 위세를 얻을 수 있겠는가? 흥망과 이해 역시 담판에 달려 있다”라고 했다. 강동육주(江東六州)를 담판으로 얻어낸 서희(徐熙)가 떠오른다. 예전에는 했는데 지금 우리의 외교는 어떠한가?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계고질금(稽古質今)이 나의 스승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의암의 옛글을 헤아려 현금의 상황으로 따져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국민의 신임과 인화요, 적국을 능가하는 기술력을 갖출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고,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하여 적국과의 외교적 담판에 나서라는 뜻이겠다. 옛글을 읽는 뜻은 이러한 데 있다.

이종묵(서울대 교수·국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