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에 경제 보복을 취하면서 한·일 관계가 수교 이래 최악이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 같은 대한(對韓) 수출 기습 조치는 한국의 대일 반감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다. 현재 아베 신조 총리는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일병합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일본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기세다.
아베는 트럼프류로서 ‘일본 우선(Japan First)’주의자이다. 한국과는 상극이지만, 일본 입장에서만 보면 아베는 ‘꽤 괜찮은’ 지도자다. 잃어버린 20년에서 식물경제를 재활하고 국가비전을 제시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도 사실상 아베 작품이다. 참의원 3분의 2를 넘기지는 못했지만 정상국가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모습은 집요하면서도 섬뜩하다. 평화헌법 개정은 외조부(기시 노부스케)와 아버지(아베 신타로)의 오랜 가문의 굴레를 벗는 동시에 아베가 기필코 실현하고 싶은 일본의 꿈(日本夢)이다. 전략적 가치를 공유하지 않고, 중국편이기도 한 한국은 일본의 국가전략에 없다.
아베의 수출 보복은 그간의 일본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낯설어도 익숙해져야 한다. 일본 외교는 결국 미국 외교를 따라간다. 방향도 행태도 그렇다. 하지만 이번 조치로 일본 외교의 한계를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전략적으로 보면 일본은 하수는 아닐지라도 고수도 아니다. 일본은 외형적으로 무척 정교하게 보였으나 의외로 정교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일 “국가 간의 신뢰관계가 훼손된 데 따른 조치”라며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냈다. 사드 배치 이후 역시 한국에 경제 보복을 취했지만 물적 증거를 남기지 않고 심증적으로만 추측하게 한 중국 외교보다는 한수 아래였다.
일본의 진짜 잘못은 역사문제를 정치화하고 경제와 연결했다는 점이다. 국제사회는 처음엔 한국이 신뢰를 지키지 않는다는 일본의 프레임에 잠시 주목하겠지만 곧 부메랑을 맞게 될 것이다. 일본이 추가로 한국을 제재하면 점차 일본에 불리한 게임이 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고 위협했던 가해자가 다시 2차 가해를 가하는 프레임에 갇히게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를 피하고 있는 일본과의 직접 대화와는 별개로 한·미·일과 한·중·일 등 다자접근을 통해 일본 외교의 모순을 은연 중에 부각시켜야 한다. 동시에 아베와 일본을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 현재 일본 내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혐한 정서가 높지만 아직 양심적 시민세력이 남아 있다. 또 세대별로 50대 이상과는 달리 30대 이하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여전하다. 지난해 문 대통령이 한·중·일 정상회담차 방일했을 때 1박만 하고 돌아올 것이 아니라 대학생이든 시민사회든 직접 호소를 했더라면 좋았을 듯하다. 이들에 대한 공공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다음, 1965년 기본협정 체제를 넘어서는 한·일 관계의 재정립을 논의해야 한다. 이번 경제 갈등은 서로의 내공을 보고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며 신질서 수립의 지분을 확인하는 탐색이다. 한국의 새로운 역내 질서의 위상과 실력을 확인하는 자리이다.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반감, 대일 경제 의존도 경감이나 한국 수출다변화를 넘어 한·일 간 수직적 산업구조 변화, 미래 신성장을 위한 고기술 경쟁, 글로벌 가치사슬의 재편까지 염두에 둔 전략 간의 충돌이다. 위안부문제에 이어 강제징용 등 한·일 간 주요 현안들은 사실 역사의 후유증이다. 전후 극복하지 못한 이런 문제들이 국제질서의 혼란을 틈타 다시 부딪히고 있다. 종국적으로는 한국의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언권 확보와 관련이 있다. 전후 질서의 미처리로 한반도는 오늘날 분단 상태로 남게 되었고 남북 대결과 핵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힘과 덩치는 커졌고 발언권도 커졌다.
양 지도자 간 출신과 성장 과정의 차이는 문 정부의 남은 2년여 임기 동안 한·일 관계를 여전히 긴장시킬 것이다. 그 이후에도 또 다른 문재인과 아베로 계속 출렁일 것이다. 지금 무리하게, 애매하게 해결을 서두르기보다는 차라리 갈등이 곪아 터지도록 두는 것이 미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물론 포스트 아베와 문재인정부 이후에도 양국의 경쟁적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기는 어렵지만, 이 기회에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단, 지금은 그 협상 타이밍이 아니다.
황재호 한국외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