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전 세계를 상대로 일본의 수출 규제는 부당하다며 ‘국제 여론전’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16개국 고위급 통상교섭 당국자가 모이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공식 협상장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의 부당성을 알렸다. 국제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에 이어 아태 주요국에도 일본이 자유무역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 ‘우군’을 최대한 많이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6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중국 정저우에서 열리는 ‘제26차 RCEP 공식 협상회의’에 한국 협상단이 참석 중이라고 28일 밝혔다. 산업부는 여한구 통상교섭실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협상단이 “일본의 수출 규제가 역내 무역자유화 노력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협상장에서 강조했다”고 밝혔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RCEP 참가국들도 수혜를 보고 있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글로벌 가치사슬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 피해를 줄 것이라는 게 핵심 주장이다. 산업부는 관계자는 “13개국과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RCEP는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그리고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16개국이 참여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이다. 2012년 협상이 시작됐고 연내 실질적 타결을 목표로 각 국 간 논의가 진행 중이다. RCEP에 참여하는 16개국의 국내총생산(GDP)을 더하면 25조 달러로 전 세계 GDP의 약 28%를 차지한다.
한국 정부로선 RCEP 공식 협상회의는 일본 수출 규제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좋은 무대였다.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미국이 탈퇴하면서 그동안 RCEP 협상에 미온적이던 일본이 무역 동력을 얻기 위해 RCEP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RCEP는 중국이 미국 중심의 국제무역에 대항하기 위해 추진하는 자유무역 성격이 짙다. 중국 중심의 협정에서 일본이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선 자유무역의 가치를 더 중시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일본이 한국에 수출 규제 조치를 내렸다는 모순적인 상황을 한국이 잘 설명한다면 일본을 수세로 몰 수 있다.
한편 한·일 양국은 RCEP 공식 협상을 계기로 지난 27일 고위급 양자회의를 개최했다. 여한구 통상교섭실장과 일본 경제산업성 아키히코 타무라, 외무성 야수히코 요시다 등 4명의 RCEP 협상 수석대표들이 만났다. 다만 일본의 수출 규제를 단독 의제로 내세운 양자회의는 아니었다.
양자회의에서 여 실장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전략물자 수출 우대 국가)로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일본 측에 강조했다. 여 실장은 “일본의 수출 규제는 국제 무역규범을 훼손하고 역내의 무역자유화를 저해한다. 수출 규제를 즉시 철회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로 유지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다음 달 2일 각의(국무회의)를 열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세종=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