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시대… 드라마 제작 현장 변화 바람 불지만 갈 길 멀어

입력 2019-07-29 04:05

밤샘 촬영 등 고강도 노동으로 악명 높던 드라마 제작 현장에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9월까지의 계도 기간은 있지만, 이달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공식 도입됐기 때문이다. 다만 뿌리 깊은 노동 관행과 제작비 상승, 스태프·제작사·방송사의 이해관계 조율 등 과제가 만만찮아 제도 안착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여태껏 드라마 촬영 현장의 노동 여건이 열악했던 건 표준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환경 탓이 컸다. 제작사가 스태프와 개별 용역 계약이나 팀 단위 계약인 턴키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현장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난해 근로기준법이 개정돼 주 52시간이 관심사로 떠오름에 따라 드라마 촬영 환경 개선에 대한 논의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높아진 노동 감수성을 보여준 사례 중 하나가 ‘아스달 연대기’(tvN)였다. 제작비 540억에 달하는 기대작이었지만 장시간 촬영으로 고발을 당하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주 52시간제를 맞이한 현장의 분위기는 어떨까. 촬영을 지휘하는 연출자들은 적극적으로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호텔 델루나’(tvN)의 오충환 감독은 지난 8일 제작발표회에서 바뀐 시스템에 대해 “불편한 부분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스태프가 수면과 안정을 취하면서 집중도가 생겼다”며 “다만 촬영이라는 게 시간을 투여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노동집약적인 부분이 있어 효율적인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화를 체감하는 건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배우 한석규는 이달 초 ‘왓쳐’(OCN) 제작발표회에서 “(주 52시간 근무제가) 현장의 가장 큰 변화다. 지켜나가는 게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것도 잘하면서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겠다”고 각오를 전한 바 있다.

다만 모든 촬영 현장이 빠른 개선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방송 스태프로 근무 중인 40대 A씨는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변화가 있는 현장도 있지만, 고강도 촬영이 이어지는 현장이 여전히 많다. 60% 정도는 되는 것 같다”며 “연출자와 제작사에 따라 환경이 들쭉날쭉 변한다. 표준근로계약서가 빨리 정착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제도 안착까지는 여러 허들을 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달부터 도입된 주 52시간제는 현장 스태프가 아닌 300인 이상 사업장의 지상파 PD 등에 한해 적용되고 있다. 지난달 18일 지상파 3사,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로 구성된 4자 협의체가 현장 표준근로계약서 적용 등을 골자로 하는 제작환경 기본 가이드라인을 합의했지만, 아직은 기본적인 수준이다. 다양한 계약 형태가 혼재하는 방송 현장 특성상 근로계약의 적용 범위 등이 쟁점이 될 전망이다.

제작비의 급격한 상승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68시간제 기준으로도 인건비로 인한 드라마 제작비가 20~30% 정도 올랐는데, 52시간제가 본격 도입되면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제작이 위축되는 건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제작비를 감당 못한 방송사들이 드라마를 예능으로 대체하고 있는 게 그런 사례 중 하나”라고 전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사전제작이나 반(半)사전제작도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일본에서는 신마다 촬영 횟수와 소요시간 등을 꼼꼼히 체크해가며 촬영을 진행한다. 합리적으로 스케줄을 짜 촬영 현장을 효율적으로 변화시키는 게 보다 근본적인 방법일 것”이라고 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