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비공개로 한국에 유감 표명 후 조기 수습 하려 한 듯

입력 2019-07-25 04:01
정석환(왼쪽 두 번째) 국방부 정책실장과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들이 24일 국회를 방문해 나경원(오른쪽 두 번째) 원내대표를 비롯한 자유한국당 지도부에게 전날 중국·러시아 군용기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무단 진입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종학 선임기자

러시아가 전날 독도 영공 침범을 인정하는 듯한 입장을 우리 군 당국에 전했다가 하루 만에 돌연 영공 침범 사실 자체를 부인한 것을 놓고 갖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가 당초 비공개로 한국 측에 유감을 표명하며 이번 사건을 조기에 수습하려 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청와대가 러시아 측 유감 표명 입장을 상세히 공개하자 러시아가 반발해 입장을 바꾼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24일 주한 러시아대사관 차석 무관과의 전날 협의 내용에 대해 “러시아 무관이 ‘정상적 루트(비행경로)를 밟았다면 (영공을) 침범할 이유가 없다. 오작동일 수 있다. 이 상황이 향후에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청와대는 국방부로부터 이런 협의 내용을 보고받은 뒤 “이번 사태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는 러시아 측의 입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뒤 러시아는 “러시아 군용기가 한국 영공을 침범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 조종사들이 러시아 군용기의 비행항로를 방해하고 안전을 위협하는 비전문적인 비행을 했다”는 공식 입장을 한국 국방부에 전달했다. 청와대 설명과는 180도 달라진 것이었다.

그러자 국방부는 러시아 측에 ‘전날 기기 오작동 가능성 등을 언급한 것은 무관 개인 의견이었느냐’고 물었다. 러시아 측은 “본국 훈령을 받아 말했던 것”이라며 러시아 정부와 협의됐던 내용이라고 답변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측 답변을 그대로 믿을 경우 러시아는 전날 무관을 통해 기기 오작동 가능성을 거론하며 영공 침범에 대한 유감 표명과 재발 방지까지 약속했다가 다음 날 돌연 번복한 것이 된다.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러시아의 입장 변화에 대한 질문에 “짐작하는 이유는 있다”면서도 “그것은 공식적으로 밝힐 만한 것은 아니다. 짐작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 전문가는 “국방부로 불려온 무관 얘기를 청와대가 일일이 공개하는 것은 국제적인 관례와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며 “양국 간 협의가 충분히 이뤄진 뒤 러시아 측 입장을 밝혀야 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입장 변화로 이번 영공 침범 사태가 조기에 마무리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국과 러시아는 25일 양국 국장급 실무협의를 열 예정이다. 이 협의에는 한국 국방부 국장급 당국자와 주한 러시아대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러시아 측에 독도 영공 침범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시할 것”이라며 “우리는 기기 오작동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관계자는 “군용기가 조종사 의지와 무관하게 경고사격을 한 차례 받은 지점으로 다시 이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서 이뤄진 중·러 연합 공중훈련의 정당성을 강조하려고 일단 잡아떼기 작전에 돌입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러시아가 영공 침범 사실을 계속 부인할 경우 지난해 12월 발생한 일본 초계기 위협비행을 둘러싼 일본과의 군사적 갈등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도 뒤따른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