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 여파로 중국의 구리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인 칠레의 구리위원회는 최근 2분기 보고서를 내면서 이렇게 관측했다. 이어 올해 구리 가격 전망치를 파운드(453g)당 3.05달러(약 3594원)에서 2.89달러(약 3405원)로 낮춰 잡았다. 구리위원회는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긴장이 전 세계적으로 경제성장 전망치를 낮추면서 구리 가격 하락을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구리 박사’, 경기를 예언하다
원유 가격은 향후 경기를 가늠하는 지표로 종종 쓰인다. 중동산 두바이유나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의 등락에 따라 호황이냐 불황이냐를 진단하거나 예측한다. 다만 유가를 기준으로 하는 경기 전망에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경제적 요인 외에 가격을 움직이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중동 지역에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등 정치적 리스크가 등장하면 예외 없이 원유 가격이 치솟는다.
또 다른 경기 선행지표로 쓰이는 구리는 원유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준다. 지정학·정치적 영향을 훨씬 덜 받는 원자재다. 세계 곳곳에서 생산되는 데다 자동차, 건설, 해운, 가전 등 제조업 전반에 걸쳐 재료로 쓰인다.
예를 들어 경기가 좋아지면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면서 공장을 더 짓는다. 소비자들은 가전제품 등의 소비를 늘린다. 건물이 들어서거나 가전제품 생산이 늘수록 구리의 쓰임새는 많아진다. 수요가 증가하면 구리 가격은 오른다. 반면 경기가 하락하면 구리 수요 감소로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경기를 미리 예측해 구리를 미리 사두거나 내다 판다. 이에 구리의 선물가격은 실물경제에 앞서 움직이는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 ‘닥터 코퍼’(Dr.Copper·구리 박사), ‘마담 코퍼’(Madame Copper·구리 마담) 같은 별칭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닥터 코퍼의 활약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정보기술(IT) 버블’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구리 선물가격은 급락했다. 앞서 아시아 외환위기를 촉발했던 1997년 태국 바트화 폭락 사태에 이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에도 구리 선물가격이 떨어졌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는 구리 선물가격 그래프와 주요 글로벌 기업의 ‘카펙스’(CAPEX·설비투자비용) 그래프는 거의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닥터 코퍼가 예측한 경기지표에 따라 기업의 설비투자 증감이 이뤄졌다는 의미다. 구리 가격은 특히 신흥국 경기 흐름을 가늠하는 데 유용하다. 신흥국의 경우 성장을 위해 사회기반시설에 많이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진국보다 구리 수요가 더 많다는 얘기다.
‘닥터 코퍼’ 귀환이냐, 퇴장이냐
닥터 코퍼가 매번 ‘족집게’는 아니다. 최근 들어 체면을 구긴 적도 심심치 않다. 경기 선행지표로서의 구리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프랑스 최대 투자은행인 소시에테제네랄(SG)은 2011년 ‘구리 박사는 죽었다’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2008년 미국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구리 가격이 오히려 경기 변화를 뒤쫓기 바빴다”고 꼬집었다. 선행지표가 아닌 후행지표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다른 사례도 있다. 2011년 초 구리 선물가격은 t당 1만 달러를 오르내리다 그해 말 20% 넘게 떨어졌다. 이듬해 말에는 6% 정도 가격을 회복했다가 2013년 말 다시 6% 정도 떨어졌다. 이와 달리 같은 기간 미국의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5~10% 상승세를 보였다. 미국의 경제성장률도 평균 2%대를 유지했다. 구리 가격에 따른 경기 변화는 어느 정도 롤러코스터를 타야 했지만 미국 경기엔 이런 흐름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닥터 코퍼의 체면이 구겨진 셈이다.
닥터 코퍼의 경기 예측력이 약해진 배경에는 중국이 있다. 중국의 구리 수요량은 전 세계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최근 들어 원자재로서의 구리보다는 투자재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 투기 수요가 끼어들면서 경기와 별 상관없이 구리 선물가격의 폭·등락이 이어지기도 한다. 이른바 ‘중국 착시’ 현상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AI)과 무선 네트워크를 주축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구리 수요가 유지될까. 경기 선행지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한국광물자원공사 자원정보실 관계자는 26일 “중장기적 관점에서 증가율은 낮아질 수 있지만 구리 수요는 유지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무선’이 늘면서 전선에 쓰이는 구리는 줄지만 각종 센서와 카메라, 데이터 장비 등에 들어가는 구리 사용량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차에도 구리가 많이 쓰인다. 현재 휘발유 엔진 차량 1대에는 구리가 약 20㎏ 들어가는데, 전기차에는 40㎏이 필요하다.
지난 23일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거래된 구리 가격은 t당 5968.50달러로 3개월 전(6488달러)보다 8.1% 떨어졌다. 광물자원공사에 따르면 향후 3년간 구리 가격은 25% 정도 오를 전망이다. 먹구름 가득한 세계 경기 전망에 각국 중앙은행은 통화완화(금리 인하) 기조로 몸을 틀고 있다. 구리 박사의 예견은 과연 얼마나 적중할까.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