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기사가 주소를 검색하니 ‘박서보 기지’라고 바로 떴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661㎡(약 200평) 단독주택 자리에 조병수 건축가가 설계한 4층 건물 박서보 기지는 자택이자 작업실이며 수장고였다. 갤러리까지 갖췄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브랜드가 된 ‘묘법’의 초기 시리즈부터 최근작까지 129점을 선보이는 회고전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이 한창이다. 박서보(88) 선생을 지난 18일 박서보 기지에서 만났다.
박서보는 단색화의 대표주자로 교육자·행정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홍익대 사단을 거느린 패권주의자라는 비판도 따라다닌다. 광폭 행보에 대한 호오가 있긴 하지만, 도전적인 기질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1956년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반대 선언’을 발표했다.
“예술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동족상잔을 겪었다. 나라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그런데 당시 그림은 1920년대, 30년대식이었다. 광주리에 조선백자가 있거나 닭을 시장에 팔려고 가는 대단히 목가적인 그림이었다. 케케묵은 사실주의였다. 우리는 전쟁을 겪었다.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구미에서는 추상이 유행했었다. ‘반(反) 국전’은 추상을 하자는 거였나.
“그 시대에 맞는 걸 해야 한다. (베르나르) 뷔페의 초기 작품을 제일 좋아한다. 대학 졸업 후 누가 뷔페의 작품이라고 책을 보여줬다. 돈이 없으니 침대 시트로 캔버스를 짜고, 싸구려 흰색을 사다가 바르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렸더라. 연필로 수백 번씩 그어서 말이다. 시대의 아픔을 정확하게 표현한 거였다.”
-(연필로 선을 긋는) 묘법은 뷔페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건 다른 맥락이다. 연필은 창조하려고 쓰는 게 아니라 나를 허무는 갈고리 같은 거다. 연필로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내게 그림은 수신(修身)을 위한 수행의 도구가 된다.”
-‘회화 No. 1’으로 국내 최초 앵포르멜(전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추상으로 표면이 끈적끈적한 작품) 작가로 평가받았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 잭슨 폴록(물감을 흩뿌리는 방식의 추상화)과 닮았다.
“그 당시 그림 재료가 없었다. 제일 싼 게 을지로 페인트 가게에서 파는 미제 무광 에나멜이었다. 에나멜을 사려면 종로 화신 네거리를 지나가야 했는데, 건물들이 다 폭격을 맞았더라. 1층이 뻥뻥 뚫리고 철근이 그대로 드러나고…. 에나멜은 유화 물감하고는 다르게 바르면 먹처럼 쫙 퍼져나갔다. 그걸 흘려서 번지게 해봤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를 보고 나도 모르게 그런 그림이 나왔던 거다.”
-그 작품을 두고 앵포르멜이라는 용어를 직접 썼나.
“그런 용어 자체를 몰랐다. 그림을 58년 화신갤러리에서 연 현대미술가협회전에 내놓았는데, 이세득이라는 선배가 오더니 ‘이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앵포르멜인데’ 하시더라. 그 양반은 일본에서 사업하는 친구들이 미술책을 사다 줘 알고 있었던 거다. 이세득씨가 미술책을 빌려줘서 서로 돌려봤다. 그렇게 해서 앵포르멜 영향을 받게 됐다.”
평생의 대표작이 된 ‘묘법’의 탄생 과정을 물었다. 학내 갈등으로 홍익대 교수직을 그만둔 66년 무렵이었다고 했다.
“세 살배기 둘째 아들이 제 형이 쓰는 국어 공책 네모 칸 안에 글자를 집어넣으려고 애쓰다가 안 되니까 앙 울더니 빗금을 쫙 긋고는 포기를 하더라. 내가 찾던 게 그거였다. 대학 와서 계속 나 자신에게 ‘너는 누구냐. 서양 놈 했던 찌꺼기를 했던 게 아니냐’라고 반문을 하다 책을 읽었다. 노자 장자 불경까지 죽자사자 읽었다.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어떻게 비우나, 그 방법론을 몰랐는데 둘째 아들의 포기를 보고 힌트를 얻었던 거다.”
‘묘법’ 1호는 67년에 나왔다. 세상에 처음 공개한 것은 75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 흰색 전’에서였다. 동경화랑 전시 이후 한국에서는 모노크롬이 유행했다(단색화는 ‘단색조’ ‘한국적 모노크롬 ’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왜 박정희 정권에서 단색화가 나왔을까.
“83년 일본에서 열린 한·일 종이전에 참가했다. 미국 관람객이 이런 질문을 하더라. ‘한국 현대미술은 대단히 금욕적이다.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로서 그런 것이 아니냐.’ 나는 정치적인 발상을 한 적이 없다고 부정했다. 그런데 그 후 내 머리에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시대 산물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단색화 인기가 주춤하고 있다(생존 작가 중 작품값이 10억 원이 넘는 이른바 ‘10억원 클럽’의 3인은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등 모두 단색화 작가다).
“주춤하는 게 아니라 물건이 없어 그런 거다. 나만 해도 화재가 나고 도둑맞고 해서 작품 수백 점이 사라졌으니까.”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는 자신의 화가 인생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를 보수세력은 혁신주의자라고, 좌파세력은 보수 꼴통이라고 합니다. 나는 유일한 개혁주의자예요. 평생 개혁한 사람입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