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좋아했던 최인훈 1주기 맞아 딸이 부르는 망부가

입력 2019-07-20 04:05
소설가 최인훈(가운데)이 두 손녀와 함께 찍은 사진. 최인훈의 딸 윤경씨는 아버지가 손녀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고 무방비인, 사랑만인 표정”을 지었다고 적었다. 최인훈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손녀가 참 좋은 거다. 책임은 없고 사랑만 주어도 되니.” 삼인 제공

딸이 물었다. “아빠는 지금 생각에 제일 좋다, 생각되는 책이 뭐예요?” 머뭇거리기만 하던 아버지는 딸이 “하나만 꼽아 달라”고 거듭 묻자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와 딸의 대화.

“왜요?”

“거기 보면 자기 동생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거든. 그리고 수녀원에 들어가 버린다고. 결국 사랑이란 건 그런 게 아닌가.”

“사랑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평생을 괴로워해도 다 알 수 없었는데. …지금도 괴로워, 제일.”

“뭐가요?”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건가. 그게 제일, 괴롭지.”


여기서 ‘아버지’는 ‘광장’의 작가 최인훈(1936~2018)이며, 저런 대화가 실린 책은 작가의 1주기(오는 23일)를 앞두고 출간된 ‘회색인의 자장가’다. 책은 최인훈의 딸 윤경(45)씨가 담담하게 써내려간 에세이다. 윤경씨는 어사무사한 아버지와의 추억들을 되돌아보면서, “기억과 감정이 고개를 내민 순서대로”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하나씩 글로 옮겼다.

그동안 최인훈의 작품세계가 만든 높디높은 봉우리를 그려낸 평론이나 기사는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글들과는 결이 다르다. 무엇보다 최인훈의 소설이 배태된, 작가의 내밀한 일상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부분이다.

최인훈은 딸에게 “머릿속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언급했다. “말로 행동으로 사건으로 일어나는 일만 현실이 아니야. 요기 쪼그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엄연한 현실인 거지. 안과 밖이 어느 게 더 중요한 게 없어.” 관념적이었던 그의 소설처럼 얼마간 어렵게 여겨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윤경씨는 아버지의 이 말을 되새기면서 이제야 그 속뜻을 넘겨짚는다고 썼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가공의, 상상의, 예술의 세계가 지니는 가치와 중요성을 내게 알려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아버지 최인훈’의 삶을 그려낸 부분이다. 최인훈에겐 읽고 쓰는 일이 삶의 거의 전부였다. 바깥출입은 좋아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강퍅하게 여겨지는 지점도 적지 않은데, 가령 최인훈의 자녀들은 TV 뉴스도 “신랄한 비평”을 곁들이지 않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유치하다는 이유에서 아이들이 ‘뽀뽀뽀’를 보는 것도 금지하곤 했다.

말과 글에 관해선 결벽증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이 글은 어떠냐”고 물었을 때 윤경씨가 “좋은 것 같아요”라고 답하면 “좋으면 좋은 거지, 같은 건 뭐냐”고 집요하게 추궁했다. ‘절대로 ~할 거예요’처럼 주술 호응이 엉터리인 말을 쓰는 것도 달갑잖게 여겼다.

눈이라도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최인훈은 아내와 실랑이를 벌였다. 아내는 마당에 사람 다닐 길은 내야 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그는 “심미적 효용”을 중요하게 여겼다. 눈을 치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눈 위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 때도 아버지 눈치를 봐야 했다.

하지만 항상 근엄하고 권위적인 아버지는 아니었다. 살뜰한 가장이었다. 자식들을 누구보다 아꼈다. 최인훈은 딸에게 “씩씩한 여성”이 될 것을 독려하면서도 과잉보호할 때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날씨가 약간이라도 춥거나 더우면 학교에 가지 말고 쉬라고 했다.

뜻밖의 이야기도 한가득 실려 있다. 손녀들과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최인훈은 한국 문단의 거목이었지만 손녀의 말 한마디엔 꼼짝달싹 못 하고 번번이 지는 귀여운 할아버지였다. 손녀가 네댓 살이 됐을 때부터는 손녀의 ‘지시’에 따라 손을 들고 벌서는 일도 종종 있었다.

‘회색인의 자장가’는 이렇듯 최인훈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를 잘 모르는 독자여도 속절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힘이 있다. 윤경씨의 필력은 어지간한 프로 작가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행간에 진득하게 묻어나는 자책과 회한의 감정도 인상적이다.

윤경씨는 “나는 아버지의 인생에서 큰 사건이 되지 못했다”고 썼다. 당신처럼 글을 쓰기를 바랐던 아버지로부터, 그토록 도저했던 문학이라는 세계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한 멀리 달아나고자” 했던 게 그의 삶이었다. 하지만 이런 책이 문학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회색인의 자장가’는 독자의 코끝을 알싸하게 만들어줄,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문학 작품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