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최연하] 떠나라, 당신의 빈 방으로

입력 2019-07-17 04:02

화려한 색상의 수영복을 입은 여인 세 명이 모래사장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시원한 포즈를 취한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피카소의 그림 ‘바캉스’는 관객을 그림 속 바닷가로 이끌기에 충분할 만큼 매혹적이다.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비롯된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는 ‘비어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모두가 휴가를 떠난 빈 도시를 비유하는 말이라고 한다. 바캉스, 휴가, 여가, 레저는 조금씩 언어의 뉘앙스가 다르지만 일상의 흐름이 일시 정지되며 새로운 숨이 통하게 하는 공통의 효력이 있다. 바쁜 현대인의 일상에서 선물 같은 단어이다. 특히 레저(Leisure)의 어원을 좇아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 ‘허용되는’ ‘자유로운’과 더불어 ‘철학’ ‘명상’ ‘창조적 활동’까지 찾을 수 있다. 어원에서 살핀 레저의 본질은 물질적 관계와는 무관하며, 아무런 구속이 없는 상태의 자유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고대 철학자들도 ‘노동의 필요로부터 자유로운 시간’ ‘인간 영혼이 신의 모습을 만나고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레저의 가치를 언급한다.

일상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선사하는 단어가 또 있는데 바로 ‘놀이’이다. 노동 중심적 관점에서 봤을 때 놀이는 무용한 낭비처럼 보이지만, 다시 일을 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힘을 재충전하는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으로서 놀이는 인간다운 삶을 향유하는 데 필수 덕목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진지함 못지않은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이 놀이인 것이다. 노동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노동만큼이나 축제가 중요했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문화에도 함께 일하고 춤 추고 노는 일은 똑같이 중요한 일이었다. 이처럼 삶에서 노동과 유희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가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둘의 대립각이 첨예해지는가 싶더니, 후기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둘의 관계가 기이한 변이를 보이게 된다. 바로 과잉생산을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노동하는 인간을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ans)으로 바꾼, 소비사회의 시대가 된 것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하는 소비주체들은 주입된 욕망을 따르며 소비가 곧 놀이가 돼버렸다.

7월 들어 해수욕장이 일제히 개장되며 본격적으로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다. 피카소의 그림 ‘바캉스’처럼 여름휴가 시즌에 맞춰 유포되는 판타지들이 미디어에 속속 등장한다. 주로 낭만, 명품, 젊음, 에스라인, 힐링, 웰빙 등으로 포장된 여행상품들이다. 우리의 시청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휴가판타지는 그것을 소비하지 않으면 ‘휴가(놀이)로부터 소외’를 겪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휴가를 소비하라’고 부추긴다.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 상기시키며 향유를 강제하기도 한다. 휴가 때 여행을 하지 않으면, 노동과 휴가로부터 동시에 소외될 것처럼, 미디어에 의해 조장된 타자의 욕망들이 마치 우리 자신의 주체적 욕망인 양 시끄럽게 넘실댄다. 심지어 괴테의 명언인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 당신이 자주 가는 곳, 당신이 읽는 책이 당신을 말해준다”에서 ‘당신이 가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만 떼내어 만든 여행상품 카피는 보여주기식 소비를 쫓아가는 강박관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관광(觀光)은 빛을 보는 일이다. 관광을 떠난다는 것은 빛을 찾는 일에 다름 아니다. 관광과 함께 풍경(風景)이라는 단어 속에서 바람이 만들어낸 경관, 바람과 햇볕, 그림자라는 뜻을 찾을 수 있다. 바람과 햇볕과 그림자의 표상이 풍경인 것이다. 아름다운 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풍경을 맞이하는 일이 관광(觀光)이고, 레저이고, 휴가이지 않을까? 내가 머무는 이 도시가 볼거리 많은 여행지는 아니었는지, 그리고 바캉스는 내 빈 방에 고요히 머물며 일상의 신성한 자유를 회복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최연하 사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