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 회계법인에 다니는 회계사 권모(32)씨는 은행 영업점 창구에서 10분 넘게 기다려 본 적이 없다.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 홈페이지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해 영업점별 혼잡도를 예측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권씨는 “회사 주변에 모두 4개의 우리은행 지점이 있는데, 혼잡도가 낮은 영업점에 가면 대기표를 뽑고 나서 금방 차례가 온다”며 “마치 시내버스 정류장마다 버스별 혼잡도를 나타내주는 것 같다”고 15일 말했다.
고객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독심술’을 은행들이 익혔다면 어떨까. 최근 은행권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 분주하다. 빅데이터 전담조직을 만들어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가 하면 아예 임직원을 현업에서 뺀 뒤 빅데이터 전문인력으로 양성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국회에 계류 중인 이른바 ‘데이터경제 3법’이 조속히 논의돼야 한다고 말한다.
NH농협은행은 지난 10일 자체 빅데이터 플랫폼인 ‘NH빅스퀘어 2.0’을 고도화시켰다고 밝혔다. 핵심은 머신러닝(Machine Learning·기계학습)이다. 인공지능(AI)이 스스로 데이터를 모아 분석하고 고객의 행동 패턴을 미리 예측하는 것을 말한다. 이 플랫폼은 빅데이터 자료를 보기 쉽게 시각화해 NH농협은행의 마케팅 전략에 다방면으로 쓰일 예정이다. 지난 4월과 6월에 수요 고객을 빅데이터로 예측해 상품·서비스를 안내하는 ‘고객 맞춤형’ 마케팅을 선보이기도 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3월 전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제1회 데이터 분석 경진대회’를 실시했다. 정리되지 않은 많은 데이터 자료를 두고 얼마나 가치 있는 결과를 얻어내는지를 겨루는 행사였는데, 모두 33개 팀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업영업 분야에도 빅데이터를 활용한다. 지난해 2월 도입한 기업정보관리 통합시스템 ‘빅아이’는 빅데이터로 기업의 미래신용을 예측해 여신 심사를 할 때 활용한다.
KEB하나은행은 아예 임직원들을 데려다 ‘데이터 전문가’로 키우고 있다. 지난달 10일 그룹 차원에서 ‘융합형 데이터 전문가 과정’을 만들었다. 전문가 과정에 참여한 임직원들은 4개월가량 현업에서 벗어나 빅데이터 관련 전문가와 교수진에게 교육을 받는다. KEB하나은행은 지난해 3월 15일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과 업무협약을 맺고 빅데이터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은행들이 빅데이터에 경쟁적으로 뛰어드는 이유는 ‘디테일’에 있다. 빅데이터를 많이 활용할수록 차별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고, 수요 고객층을 정밀하게 조준할 수 있다. 은행권 빅데이터 부서 관계자는 “아무런 기반 없이 전략을 수립하기보다는 데이터 기반 전략이 위험부담을 줄이고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빅데이터 사업이 탄력을 받으려면 지난해 11월부터 국회에 계류 중인 ‘데이터경제 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보호법)이 통과돼야 한다. 이 법안들은 개인의 가명정보를 금융회사들이 빅데이터 분석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예를 들어 현재 은행은 ‘20대 남성이 지난달 100만원을 썼다’는 한정된 익명정보만 활용할 수 있다. 데이터경제 3법이 통과되면 ‘서울 중구 명동에 사는 김모(23)씨가 지난달 컴퓨터를 사는 데 100만원을 썼다’는 식으로 더 구체화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개인정보 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타당하지만, 이미 한국은 개인정보 관련 손해배상제도, 과징금, 과태료에 더해 다른 나라보다 엄격한 형사처벌 규정이 있다. 데이터경제 3법이 조속하게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