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권영준] 공감력 통해 위기 극복하자

입력 2019-07-16 04:03

한국경제가 내우외환으로 곤경에 빠져 있다. 연일 정쟁만 일삼는 국내정치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밖으로는 극우로 치닫고 있는 일본 아베 신조 정권과의 마찰로 양국 간 외교분쟁이 급기야 경제전쟁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이대로 방치하면서 감정적으로 맞대응한다면 한국경제가 중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피해를 볼 우려가 높다. 어쩌면 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의 피해 및 대량실업 참사에 버금가는 후폭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른다. 한·일 간 현 시국이 전쟁과도 같다고 인지한다면 고려시대 서희와 같은 지혜롭고 냉철한 전략적 외교관이 절실한데, 현 정부에서는 그런 사람이 보이지도 않고 찾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아 걱정이다. 상대방 입장을 충분히 들어주고 우리의 처지를 호소력 있게 설득하는 공감능력이 탁월한 외교전략가가 필요한데 현재 우리 정부 안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다.

2000여년이 넘는 인류역사가 수없이 많은 전쟁 속에서도 문명사회를 향해 꾸준히 발전해온 동력이 바로 인간의 공감능력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저명한 사회과학자들이 많다. 특히 미국의 경제사회학자이며 미래학자로서 탁월한 저술과 여러 정부의 자문을 통해 석학으로 평가받는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명저 ‘공감의 시대(The Emphatic Civilization)’에서 인류역사가 문명시대를 향해 성공적으로 발전해온 동인(動因)은 첫째가 공감능력이고, 둘째가 그 선한 공감능력의 바탕 위에 진보해온 과학·기술의 발전이라고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상업사회(당시는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음)가 중상주의의 폐단을 극복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의 원활한 가격기능과 함께 시장참여자들의 양심에 존재하는 ‘공평한 관전자(Impartial Spectator)’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시장참여자들의 행위를 양심적으로 분별하는 공평한 관전자가 공감능력을 증대시키는 도덕적 감성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공감능력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본을 보이신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황금률을 율법이요 선지자라고까지 하시면서 법과 규범으로 선포하셨다.

현재 극도로 혼란스럽고 자나깨나 대치국면에서 못 벗어나는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에 이를 적용해보면 정부·여당이든 야당이든 먼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면 당연히 그 답례로 원하는 대접을 받게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직후 제1야당을 가장 먼저 예방했던 그 마음자세로 야당을 대접한다면 야당이 자연스럽게 국정의 협조자로 변모할 것이고, 반대로 야당이 먼저 문재인정부의 국정에 조건없이 협조하는 자세로 나온다면 움츠러든 정부와 청와대의 가슴이 활짝 열려서 야당을 진정한 대화와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게 될 것인 바, 이는 결국 국민 삶의 증진을 위한 멋진 정치로 발전할 게 분명하다. 또한 대·중소기업 간 관계나 노사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면 현재 국내 정치·경제에서 대부분의 어려운 문제들이 쉽게 풀릴 수 있는 황금률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럴 경우 결과적으로 포용적 성장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내세운 문재인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지름길이 될 것은 물론이다.

공감능력을 통한 한·일 관계의 정상화에는 반드시 명심해야 할 금언이 있다. 일본은 과거에 겸허해야 하며, 한국은 미래에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국력이 현재처럼 1대 3이 아니라 일본과 대등해지는 그날까지 덩샤오핑이 말한 것처럼 도광양회(韜光養晦)하면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극도로 격앙된 양국 관계가 최악의 지경까지 온 것은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 전에 미래를 위해서 양국 모두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한다. 명분과 정의감에 불타는 시민단체와 달리 정부는 공감력을 바탕으로 외교의 기본인 상대방 입장을 인정해주면서 국익 우선의 대책을 세워 나가야 한다.

권영준 (한국뉴욕주립대 석좌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