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규제의 이유로 연일 ‘안보 위협론’을 강변하고 있다. 구체적 증거 없이 자국민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사린가스를 비롯해 화학무기인 VX까지 들먹이고 있다.
일본 국영방송인 NHK는 10일 “한국 측의 무역관리 체제가 불충분해서 이대로라면 화학무기 등에 전용될 수 있는 물자가 한국에서 다른 국가로 넘어갈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면서 “한국 기업이 사린가스 등의 제조에 전용할 수 있는 에칭가스(불화수소)를 생산하는 일본 회사에 납품을 재촉하는 등 안보상 부적절한 사례가 다수 있었다”고 일본 정부 관계자의 언급을 전했다.
구체적 증거 없이 납품 재촉을 안보상 부적절한 사례라면서 사린가스까지 들먹인 것이다. 1995년 도쿄 지하철에서 발생한 옴진리교의 독(사린)가스 살포로 13명이 사망하고 6300명이 다친 사건을 상기시켜 일본 국민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고 한국에 대한 불신을 키우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독가스 제조에 굳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고농도 불화수소를 사용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고농도 불화수소의 경우 주문량과 입고량을 대조해야 해 외부 유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한국 정부와 업계의 지적이다.
일본 정부는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해 연일 북한 관련설을 제기하고 있다. 한국의 WTO 제소에 대한 명분을 쌓고, 유엔의 제재 대상인 북한을 끌어들여 미국이 갈등 중재자로 나서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9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상품·무역이사회 회의에서도 “안보 우려에 따른 무역관리 재검토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WTO 규정상 전혀 문제 없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일본 언론에선 끔찍한 화학무기인 VX도 등장했다. VX는 2017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살됐을 때 쓰인 가스다.
일본 FNN 방송은 한국의 수출관리체계 실태가 담긴 자료를 입수했다며 2015년부터 2019년 3월까지 한국에서 발생한 전략물자 밀수출 건이 156건이라고 보도했다. 방송은 VX 원료가 말레이시아로, 수출 규제 대상에 포함된 불화수소가 아랍에미리트(UAE) 등으로 밀수출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방송이 인용한 자료는 조원진 우리공화당(당시 대한애국당) 의원이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제출받은 ‘전략물자 무허가 수출 적발 현황’이다. 승인 없이 생산해 불법 수출하려는 물자를 한국 정부가 적발했다는 게 내용임에도 이를 밀수출로 표현하며 안보 위협론과 연결한 것이다.
장지영 권중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