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회도 없고, 협의 대상도 아니다.’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에 대해 일본 정부가 거듭 강조한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의 조치 철회와 성의 있는 협의를 촉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사실상 거부했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들에는 이번 조치가 ‘안보’ 문제이므로 규정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WTO 제소에 맞대응하는 모습이다.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은 9일 국무회의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반도체 3개 품목 수출규제를 강화한 조치가 “협의 대상이 아니고, 철회할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고 일본 NHK방송 등이 보도했다. 그는 “수출관리를 적절히 시행하기 위한 국내 운용의 재검토”라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판박이 입장을 내놨다. 그는 “이번 조치는 적정한 수출관리에 필요한 일본 국내의 (수출관리) 운용 재검토”라며 “협의의 대상이 아니고 철회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2차 경제보복 조치 가능성도 내비쳤다. 세코 경제상은 특정 국가에 대한 외국환관리법상의 우대제도인 ‘화이트(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건과 관련해 “향후 한국의 대응에 따라 당연히 대상 품목이 확대될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수출관리가 제대로 이뤄지면 반대로 (수출규제를) 조금 완화할 수도 있다”며 한국의 대응을 지켜보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NHK는 경제산업성이 화이트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절차를 진행 중이며 제외가 확정되면 규제 대상이 공작기계·탄소섬유 등으로 확대된다고 설명했다. 아사히신문도 일본은 8월에도 규제 대상 품목을 확대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세코 경제상은 다만 한국 측 협의 요청에 “실무급에서 (한국 측에) 자세히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할 방침”이라고 했다. 스가 장관도 “한국 수출관리 당국으로부터 (수출관리) 운용 재검토에 대한 사실 확인을 요구받아 사무 차원에서 대응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양국 관계자는 오는 12일 일본 도쿄에서 만날 예정이다.
앞서 문 대통령은 전날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한국의 기업들에 피해가 실제적으로 발생할 경우 우리 정부로서도 필요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면서도 “일본 측의 조치 철회와 양국 간 성의 있는 협의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일본의 무역 제한 조치에 공식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는 한국의 WTO 제소 방침에도 맞대응에 나섰다. 일본 정부는 이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WTO 이사회에서 이번 조치가 ‘안전보장’ 문제이고 WTO 규정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회원국들의 이해를 구할 방침이라고 NHK는 전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측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수량 제한 금지’ 조항(제11조)을 어긴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안전보장상의 필요가 있을 경우 예외 규정이 있어 규정 위반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최근 일본이 강조하는 ‘안보 프레임’과 궤를 같이한다. 일본은 당초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를 ‘국가 간 신뢰관계’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자국 내에서조차 비판이 거세지자 방향을 틀었다. 자국의 화학물질이 한국을 통해 북한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억지라는 지적이 나온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