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사방에 그늘막이 펼쳐졌다. 네거리나 건널목에 커다란 양산을 펴놓은 것인데 서울에만 1500개, 전국적으로는 5000개가 넘는다. 지난 1년 사이 배로 늘어난 것이라고 한다. 가히 행정의 히트 상품이며 지방자치단체의 필수 항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적은 예산으로 피부에 와닿는 효과를 볼 수 있으니 모든 구청이 따라 할 만하다. 보행자의 잠시의 불편함까지도 배려하는 세심한 행정이라고 평가하겠지만 왠지 개운치 않은 점이 있다.
그늘막은 일종의 스트리트 퍼니처이다. 도시의 거리를 시민들이 머무는 거실이라고 한다면 거리의 시설물을 가구와 마찬가지로 쾌적하고 심미적으로 디자인한다는 점에서 유래한 용어다. 산업혁명 이후로 꾸준히 발전하다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도시 경관을 이루는 구성요소로 중요해졌다. 스트리트 퍼니처의 요건은 편의성과 안전 그리고 배경이 되는 도시와 조화를 이루는 시각적 완성도이다. 그늘막이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첫째, 안전의 문제이다. 그늘막은 접이식으로 돼 있어 영구적인 구조물만큼 견고하지는 않다. 자칫 강한 바람이나 폭우에 취약할 수 있다. 자연재해뿐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훼손하는 반달리즘 또한 경계해야 한다. 모두가 선의를 가지고 행동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도시행정의 입장에서는 지나친 낙관일 수 있다. 다른 층위의 안전 문제도 있다. 그늘막은 햇볕을 가려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둠을 드리우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노숙자의 침범이나 범죄의 위협에 놓일 수 있다. 신호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해를 피하기 위해 도심 곳곳에 위험한 장소를 만든다면 안 될 일이다. 더구나 겨울에 펼쳐지는 추위 쉼터는 밀폐된 형태여서 더욱 위험할 수도 있다.
둘째, 심미적 디자인의 문제는 주관적 영역이다. 다만, 버스정류장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햇볕과 비를 가리면서도 열린 구조이고 견고함과 겨우 걸터앉을 수 있는 불편한 의자까지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선례를 참고한 것이다. 전체의 형태, 재료, 색상 또한 끊임없이 진화한 통합적 디자인이다. 그늘막은 현대 스트리트 퍼니처가 가지고 있는 완성도에 비해 아직은 다소 거칠고 조악해서 수공예품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그늘막이 도시구조 전체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종의 징후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늘막이 필요한 이유는 보행인들이 건물과 떨어져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도로가 지나치게 넓고 네거리에는 교통섬이 있어 도로를 두 번 건너야 하는 사정이다 보니 보행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지게 된다. 이 같은 도로체계는 보행자보다는 자동차의 통행을 우선으로 했던 지난 시대의 유물이기도 하다. 거기에 공개공지라는 제도도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의 전면에는 공터를 강제하는 건축, 도시계획의 법령이 있고, 이에 따라 건물과 도로 간 간격이 벌어지게 됐다. 공개공지는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 건물에서 대피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위해 생겨난 규정인데 이것이 여과 없이 수입된 결과이기도 하다.
도시는 건축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밀접한 공간이다. 그 밀도가 특유의 경관을 만들며 공동체와 시너지와 걷는 도시의 경쟁력을 만든다. 제도로 강제되는 공터가 관계들을 멀어지게 하고 그늘막을 펼치게 하는 것이라면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다. 현재에도 신도시계획이나 재개발에서도 광로와 공개공지가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그늘막은 한동안 한국 도시의 중요한 풍경이 될 수도 있겠다.
그늘막 아래서 잠깐의 서늘함을 맛보는 사이에 짐차로 개조한 오토바이의 요란한 행렬이 이어진다. 수공예품 오토바이가 내달리는 풍경이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것이겠지만 여전히 첨단의 디자인 인력이 대량 생산 시스템을 통해 제작한 자동차의 완성도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인 월터 그로피우스가 말한 디자인의 목표가 떠오른다. ‘우리는 모방과 저열한 수공예품과 예술적 무관심과 투쟁한다.’ 자동차회사는 작은 짐차를 만들고 건설회사는 견고하고 안전하며 아름다운 그늘막을 제공하는 사회공헌을 상상해 보는 건 지나친 바람일까? 도시의 경관은 건축물과 공원뿐 아니라 거리의 작은 구조물과 지나는 자동차가 함께 완성한다.
이경훈 국민대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