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1부 :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2부 : 공동체 균열 부르는 ‘신계급’>
<3부 : 한국을 바꾸는 다문화가정 2세>
<4부 : 외국인 노동자 90만명 시대>
<5부 : 탈북민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법>
자유를 찾아,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북한을 떠나 남한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이 어느새 3만명을 넘었다. 당국의 집계에 따르면 탈북민의 고용률은 증가하고 실업률과 학업중단율은 낮아지는 등 통계상 이들의 생활 환경은 개선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탈북민은 여전히 많다. 국민일보는 최근 출신 배경과 나이, 성별, 한국 거주기간이 다른 탈북민 10명을 만나 한국 생활의 어려움과 사회에 바라는 것들에 대해 들었다.
꼬리표 못 떼면 영원한 2등 국민
인터뷰에 응한 탈북민 대부분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편견과 이로 인한 무시, 모욕 때문에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노력해도 바꾸기 힘든 북한식 말투에 대한 거리감,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 대한 편견이 결합돼 ‘사회적 낙인’을 찍는 행태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에 탈북한 김민성(가명·43)씨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내가 잘못된 걸 지적하니 ‘북한에서 내려왔으면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 이 XX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며 “남한 사람들이 남한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나도 북한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이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턱 막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남한에 살게 된 이상 탈북자라는 꼬리표를 떼줘야 한다. 우리는 그 꼬리표를 떼지 못하면 영원히 2등 국민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자녀를 잃은 남미연(가명·59·여)씨도 회사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회사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언니들이 “야, 저 여자 북한에서 왔다는데, 자식까지 다 버리고 왔나봐”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남씨는 억장이 무너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동료들에게 “아무리 그래도 자식까지 버리고 오는 엄마가 어디 있느냐. 함께 강을 건너다 자식이 물에 빠져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그것도 모르면서 꼭 그렇게 뒤에서 얘기를 해야겠느냐”고 따졌더니 그들은 그제야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
가급적 자신의 출신을 밝히지 않게 됐다는 이도 있다. 30대 여성 도연수(가명)씨는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어린이집에서 꽤 친하게 지내던 엄마들에게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 다음부터 연락이 뜸해졌다”고 털어놨다. 도씨는 “이렇게 막 친하게 지내다가도 고향이 북한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 예’ 그러면서 돌아서버리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제는 교회 말고는 북한에서 왔다는 말 자체를 안 하게 됐다”고 했다.
직장 내 탈북민 차별
탈북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겪는 불편함도 상당했다. 마선영(가명·33·여)씨는 취업 과정에서 불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라는 회사의 요구에 마음이 상했다고 한다. 조선동포 취업자에게는 외국인등록증 정도만 요구하면서 자신에게는 주민등록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는 물론 배우자의 소득증빙 자료까지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마씨는 또 “일할 때도 ‘너는 북한에서 와서 잘 모르지? 어차피 너는 잘 모를 테니까’라는 식으로 전제할 때가 많아 굉장히 자존심 상했다”고 말했다. 마씨는 과거 한 개인병원에서 일할 때 환자들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지시도 받았다고 한다. 북한 말을 쓴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방의 한 대도시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30대 여성 박수진(가명)씨도 “가게를 하다 보면 북한 사람보다 조선동포를 더 좋게 보는 사람을 종종 본다”며 “솔직히 머리 하는데 국적이 무슨 필요 있겠느냐면서도 나도 모르게 말을 안 하거나 하더라도 굉장히 천천히 하게 된다”고 했다. 박씨는 “그런 사회적 인식 때문에 자연스럽게 활동 범위도 좁아진다. 미용사가 북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도 머리 하러 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세밀한 맞춤형 복지 필요
탈북민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춘 복지정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20여년 전 탈북한 송민경(가명·45·여)씨는 “다문화가정지원센터는 지역마다 있고 프로그램도 훨씬 활성화돼 있는데 반해 새터민지원센터(북한이탈주민지원센터)는 찾기도 어려워 도움을 받기 힘들다”며 “차라리 외국인이나 귀화자와 똑같이 대우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씨는 연고 없는 한국에서 출산할 때의 어려움을 언급했다. 도씨는 “북한 여자들이 한국에 와서 아이를 낳으면 엄마도 없이 혼자 낳아야 한다. 정말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다”며 “출산하는 탈북 여성을 위한 복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제3국(중국, 동남아 등)에서 태어난 뒤 한국에 온 탈북민 자녀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목소리도 높다.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탈북민 2538명(지난해 4월 기준) 가운데 제3국 출생은 1530명으로 60%를 넘는다. 이들은 제3국 출생이라는 이유로 북한 출생 학생에 비해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적다. 북한에서 태어난 탈북 학생의 경우 국립대 진학 시 등록금 전액, 사립대는 50%를 지원받는다. 반면 제3국 출생 탈북 학생은 올해부터 첫 학기 등록금만 지원받는다. 또 북한 출생 탈북민은 병역이 면제되지만 제3국 출생 탈북 학생은 군대에 가야 한다.
제3국에서 태어난 이민석(가명·19)씨는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며 “엄마는 가난한데, 아버지도 없어 등록금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울먹였다. 이씨는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군대에 가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라고 했다.
탈북 학생 대안학교인 두리하나국제학교의 천기원 교장은 “아이들은 그저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왔을 뿐인데, 사실상 탈북자임에도 제대로 된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며 “아이들이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박재현 최승욱 기자 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