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를 두고 날 선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대응책을 찾겠다”는 소극적 반응에서 “명백한 경제 보복”이라는 정면 비판으로 급선회했다. ‘상응한 조치’라는 경고까지 등장했다. 정부는 국제법 위반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일부에선 일본의 수출 규제가 임박했다는 정치권·산업계 신호를 정부가 무시했다는 비난이 커지자 여론을 달래려는 조치로도 풀이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4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일본의 수출 규제는 명백한 경제 보복”이라고 밝혔다. 홍 부총리는 “(일본은 수출 규제를 한 것에 대해)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강제징용에 대한 사법 판단을 경제 분야에서 보복한 조치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어 “(수출 규제가) 해결이 안 된다면 당연히 세계무역기구(WTO) 판단을 구해야 해 내부 검토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실무 검토가 끝나는 대로 제소 시기를 결정하겠다”고 덧붙였다.
또한 홍 부총리는 “WTO 제소 결과가 나오려면 장구한 세월이 걸리기 때문에 유일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국제법·국내법상 조치 등으로도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JTBC 프로그램에 나와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게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의도여서 우리가 말려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홍 부총리 발언이 약간 강하게 표현됐을지 모르지만, 일본의 조치가 공식 발표된 지난 1일 우리 정부가 정한 원칙에서 벗어난 건 아니다”고 말했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관계기관 회의에서 “일본의 조치는 한국을 특정해 선량한 의도를 가진 양국 민간 기업의 거래를 제한하는 것으로 ‘바세나르 체제 기본지침’에 위배된다”며 “일본은 지난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선언한 ‘자유롭고 공정하며 비차별적인 무역환경 구축’이라는 합의정신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비판했다. 바세나르 체제란 대량파괴무기 확산을 막기 위해 1996년 출범한 다자 간 전략물자 수출통제 체제다. 기본 지침에서는 모든 회원국이 특정 국가나 특정 국가군을 ‘대상’으로 삼지 않아야 하고, 선량한 의도의 민간 거래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바세나르 체제에 일본도 들어가 있다. 안보를 위한 무역관리를 각국이 해야 하는 것은 의무”라며 수출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부 부처에서 잇따라 고강도 발언을 내놓는 데는 ‘무능력 정부’라는 비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의 보복 조치가 예상됐음에도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다 당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향후 대응은 일본의 위법성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WTO 협정에서는 정치·사회적 이유로 수출 통제를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수입·수출의 수량 제한도 금지한다. 수출입 수량을 제한하는 게 관세보다 쉽게 자유무역를 막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런 국제적 협약을 적극 활용해 반격 카드를 찾을 방침이다.
유 본부장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11조는 원칙적으로 상품 수출에 대한 금지나 제한을 허용하지 않는다. 일본이 주장하는 ‘신뢰관계 훼손’은 불명확하고 WTO 협정상 근거가 없는 이유다. 일본이 세계 경제 발전을 위협하는 수출 통제 강화 조치를 철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본의 조치와 관련, 주요 고객사들에 ‘안내 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일본의 수출 규제 발효를 이틀 앞둔 지난 2일 미국 퀄컴, 엔비디아, IBM 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의 주요 고객사에 “납품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다.
세종=전성필 기자, 김준엽 박세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