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의 얼굴 위에 낙인이 찍히듯 ‘루저(LOSER·실패자)’라는 글자가 붉은 박스에 흰색 글씨로 쓰여 있다. 2016년 10월 31일 발간된 잡지 ‘뉴욕’의 미국 대선 특집호다. 칠순이 넘어서도 이처럼 미술관 밖으로 나가 현실 문제에 대해 미술로 뜨겁게 발언하는 그녀의 이름은 바버라 크루거(74)다.
그녀가 왔다.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개관 1주년을 기념해 미국을 대표하는 개념미술 작가이자 페미니즘 작가인 바버라 크루거 개인전을 마련한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최초 전시다.
전시 명은 식을 줄 모르는 현실참여에 헌사를 바치듯 ‘바버라 크루거: 포에버’이다. 작가 생활 초년이던 30대 중반의 1980년대부터 시작한 주요 콜라주 작품부터 비교적 최근에 선보인 장소 특정적 비닐 시트 작업, 비디오 설치를 아우른다.
40년 작업을 회고하는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시종일관 부딪치는 것은 글자와 문장들이다. 전시장 도처에 흑백의 텍스트가 깔렸다. 그것도 큼직큼직한 문장들이 직설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다른 작가의 개념미술 작품이 난해한 것과 달리 크루거의 작품 세계는 그래서 미술 문외한도 어렵지 않다.
가장 압도적인 것은 가로 18m, 높이 5.7m에 달하는 전시실 하나를 통째로 도배하듯이 채운 ‘무제(영원히)’(2017년 작)이다. ‘너’를 뜻하는 영어 단어 ‘YOU’ 밑에 볼록거울에 글자가 왜곡돼 있듯이 문장이 빼곡하다. 가까이 가서 읽어보라. “여성은 남성을 두 배 확장하는 거울로 존재해왔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 딴 이 문장을 읽으면 누구라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여성이여 아름다워져라’라고 부추기는 화장품 회사인 아모레퍼시픽이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화장품을 버리라고 말하는 듯한 이런 문장이 전시되는 아이러니를 생각하는 관람객도 있겠다.
그녀는 왜 글자를 택했을까. 첫 직장이 계기가 됐다. 미국 뉴저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크루거는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뒤 잡지사에 취직했다. 몇몇 잡지사에서 10여년간 편집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은 평생의 자산이 됐다. 작가로서의 고유의 시각 언어를 디자인 경험을 통해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미술가가 되기로 한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
“미술은 왜 꼭 어려워야만 하지? 나는 내가 배운 디자인으로 대중과 쉽게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아.”
글자를 도입한 건 그래서다. 디자인 감각이 있는 그녀는 붉은 상자에 흰색 글씨, 글씨체는 푸투라 고딕이 가장 눈에 잘 띄는 것도 알았다. 옛날 잡지나 사진 도감 등에서 찾은 흑백의 이미지를 가공한 후 그 위에 함축적이고 때론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강렬한 텍스트를 병치하는 특유의 스타일은 그렇게 탄생했다.
크루거의 작품은 메시지가 명징해 선동적이었다. 1981년 작 ‘무제(당신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 1989년 작 ‘무제(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battleground)’ 등이 그런 예이다. 작가가 만든 작품을 응용한 포스터는 페미니스트들의 낙태 합법화 시위 등에 뿌려졌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작품 세계의 큰 줄기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에서 미술관 로비 바깥, 높이 6m의 거대한 유리 벽에 ‘Plenty should be enough’라는 문구가 설치됐다. 이는 크루거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구로 소비지상주의와 욕망에 대한 비판적 경구다. 로비 안쪽에는 이 영어 텍스트의 한글 버전인 ‘충분하면 만족하라’를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 한글 작업이다.
크루거는 전 세계 미술관과 전시실뿐 아니라 도심의 옥외광고판, 버스카드, 잡지, 신문, 포스터, 공원, 기차역 플랫폼 등 우리가 생활 가까이서 접하는 매체를 활용해 대중과 활발히 소통해왔다.
현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대중매체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도 본질적으로 파악한 작가가 선보인 경계 없는 활동과 대중과의 친밀한 소통은 크루거를 독보적인 위치에 자리매김하게 했다. 크루거는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