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얼어붙은 한·일 관계가 더욱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며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8개월 만에 경제 보복 조치를 내놓으면서 외교 갈등을 경제 문제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징용 배상 문제로 인한 양국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가 보복 조치에 ‘강대강’ 대응을 하기보다는 전향적인 자세로 대일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은 1일 일본이 징용 판결 관련 불만으로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재료에 대한 수출 규제를 공식화한 것에 대해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를 외교부로 불러 항의했다. 조 1차관은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가 우리 연관 산업은 물론 양국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데에 심각한 우려와 유감의 뜻을 전했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2017년 5월 이후 한·일 관계는 위안부 합의 문제와 징용 배상 문제, 일본 초계기의 위협비행 논란으로 갈등의 골이 계속 깊어져 왔다. 문재인정부는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 맺어진 한·일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자 합의 결과물인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했다. 이에 일본 측은 합의 파기라며 반발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자 한·일 간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 이후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외교적 협의와 제3국이 참여하는 중재위원회 구성 등을 제안했지만 우리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대신 지난 19일 한·일 양국 기업이 낸 출연금으로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일본 측은 곧바로 거절했다.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28~29일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정상회담은커녕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양국 관계를 풀 수 있는 채널인 한국의 한일의원연맹과 일본의 일한의원연맹 간 의회 외교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보복에 강경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우리 정부가 징용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과의 대화에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이번 일본의 대응은) 징용 판결 문제가 도화선이 됐으니 결국은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 관계가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가 기존에 제시한 기업들이 출연금을 내는 방안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적극적 방안을 모색하고 일본과 협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우리 정부가 보복 조치를 하면 일본은 더 심한 보복을 할 것”이라며 “강대강 대응은 우리 측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갈등의 출구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결국 정치적 성격인 징용 배상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외교적 사안이지만 국민 여론과 소송 당사자를 설득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은 강경한 입장인데 우리 측은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며 “컨트롤타워를 분명히 해 국내 여론과 소송 당사자들을 다독이고, 일본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