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세계적으로 일 할 힘을”… 남산서 기도로 1980년 맞아

입력 2019-07-03 00:07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가운데)가 1982년 11월 ‘장애자를 위한 자선만남의 날’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내가 슬럼프를 벗어나 새로운 열정으로 매진할 수 있었던 건 1980년 1월 1일 0시 5분 남산 팔각정에서 드린 기도와 같은 달 11일에 있었던 밀알의 첫 번째 철야 기도회를 통해서였다. 기숙사 폐쇄 이후 약 두 달간을 동가숙 서가식 하던 끝에 1979년을 며칠 남겨두고 전년에 이어 한 번 더 연합세계선교회 사택에서 겨울방학을 지낼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더욱이 밀알 화요모임을 그 장소에서 갖고 있었기에 나로서는 더욱 편리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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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31일 내가 다시 살게 된 그곳으로 친구 김산식 전도사가 놀러 왔다. 저녁때 나는 그에게 함께 남산에 갈 것을 제안했다. 단순히 한 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다사다난했던 70년대의 10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10년, 80년대를 맞이하는 순간이어서 내 느낌과 마음가짐은 여느 때 송구영신과는 달랐다. 그래서 좀 색다른 곳에서 새로운 10년을 맞이하며 마음속에 결단과 각오를 다져보고 싶었다.

함께 상도동을 출발해 남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눈이 녹지 않아 얼어붙은 빙판길을 가다가 도중에 여러 차례 넘어져 가면서 순환로 오르막길을 가까스로 올라 팔각정까지 이르렀을 때, 시간은 이미 70년대를 벗어나 80년 1월 1일 0시 5분이 돼 있었다.

팔각정에는 시민들이 많았다. 나는 중간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 자리에 선 채로 꼭 15분 동안을 기도했다.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자신감을 주십시오. 지혜를 주십시오. 제게 맡겨주신 밀알을 잘 감당할 능력을 주십시오. 밀알이 세계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시오.”

내 앞에 펼쳐지는 80년대를 바라봤다. 결혼하고 아빠가 되고 유학을 가고 밀알이 발전해서 전국을 감당하고 나아가 전 세계로 펼쳐지는 그림을 그려봤다. 그 모든 것이 영롱한 그림으로 보였다. 현실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허무맹랑한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기대를 품었다. ‘그게 말이 되니’라는 빈정거림으로 한사코 멀어져 가려는 그 허상들을 붙들고 비전을 바라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다리에 힘을 주며 힘껏 팔각정을 흔들면서 기도 제목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왠지 모를 힘과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말도 안 되는 공상들이 바로 80년대 10년 어간에 그대로 다 이뤄진 것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할 뿐이다. 당시 나의 처지로 볼 때 산을 옮겨 바다로 던지는 일보다 더 가능성 없는 일들이었다.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앞 줄 오른쪽 두 번째)가 1982년 2월 수화점자공개강좌 수료식에서 수강생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남산에서 다소 색다른 기도로 맞이한 80년은 비교적 활기 있게 시작됐다. 심기일전해 11일 금요일 밀알의 첫 번째 철야 기도회를 열심히 준비했다. 장소는 역시 창립식을 가졌던 그 자리였다. 그 철야 기도회는 얍복강가에서의 야곱과 하나님과의 씨름과 같았다. 지금은 너무 오래된 일이고 그때의 감동을 나눌 사람도 많지 않아 전혀 거론하지 않는 이야기가 됐지만, 나는 “밀알은 80년 1월 11일 그 철야 기도회 때 결판이 났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위기에 처한 연약한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환도뼈가 위골되면서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밤새워 씨름해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고 영원한 승리와 은혜의 표상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밀알도 그날 밤 분명히 운명을 결정지었다. 하나님께서 밀알을 통해 장애인 선교 사역을 하시려는 결정을 그날 밤에 내리셨다고 믿었다. 철야 기도회가 끝난 다음 날 내가 일기장에 메모해 놓은 것을 그대로 옮겨 본다.

“11일. 정말 하나님께서 밀알선교단에 큰 축복을 부어주신 날이었다. 오후 7시 30분에 시작돼 12일 새벽 5시 40분에 모든 순서를 마쳤다. 참석 인원은 모두 31명, 끝까지 철야를 한 사람은 23명. 20명이 넘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4부로 나누어 진행됐다. 1부에서는 서울여대 이수덕 교수님의 ‘장애자 교육’에 대한 특강이 진행됐다. 강의에 이어 참석자 소개 및 강의에 대한 질의응답이 있었다. 2부는 9시 40분부터 시작됐다. 20분간 정택정 선교부장의 예배 인도에 이어 10시부터 차경애 자매의 ‘장애자 복지’에 대한 특별논문 발표가 약 40분간 있었다. 내용은 퍽 유익하여 모든 단원들이 좋아했다. 그 후 단장인 내가 한국밀알선교단의 비전을 발표했다.

‘가칭 밀알관을 건립해 장애자 선교센터와 사무실 및 모임 장소를 둘 것입니다. 선교센터에는 세 분과를 두게 됩니다. 연구분과, 훈련분과, 서비스분과. 다음으로는 장애자직업전문대학 설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할 수도 있지만, 국가나 사회단체가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조직 면에서는 법인을 세운 이후 전국적 규모로 지부를 설치할 것이며 장애자 선교를 위한 세계적인 기구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11시 10분부터는 합심기도에 들어갔다. 감사 간구 헌신 소망 네 파트로 나눠 모두 20가지 기도 제목을 작성해 나눠줬다. 정말 뜨거웠고 은혜가 넘쳤고 모두가 눈물로 기도하는 기도회였다. 이어 3부로 1시부터 간증시간을 가졌고 4부에선 두 파트로 나누어 그룹별 시간이 진행됐다.

다들 많은 철야를 해 봤지만, 이번처럼 은혜롭고 전혀 졸리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고들 말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밀알선교단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다짐의 고백을 들을 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신 것을 감사한다.”

이재서 박사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