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운영에는 전략과 계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목회는 사람의 생각으로 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역사하심이다. 사람이 아무리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첫 번째 계명인데, 그 절대적 계명 앞에 늘 자신이 없었다. 교회가 아무리 전도전략을 세운다 해도 설교가 따르지 않고 교회 운영에 은혜가 없다면 교회는 자라나지 못한다. 이것만 극복하면 될 것 같은 마음에 열심히 방법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방법론은 좋았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는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에게 있다
교회가 초라하니 뭐 하나 좋은 게 없어 보였다. ‘이 바닥을 어떻게 돌파할까.’ 궁리 끝에 알게 된 놀라운 진리가 있다. 문제 때문에 고민하면서 씨름하고 돌고 돌다 보면 결국엔 ‘나 자신’이라는 원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아, 결국 내 문제였구나.’ 이 깨달음이 피부로 와닿고 실천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문제가 열리는 것을 깨닫게 됐다.
교회개척 초기, 내게는 전도자가 없고 양육할 리더가 없었다. 설교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회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런 고민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게 하셨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짚어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늘 목회를 바쁘게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바닥인가.’ 고민하던 가운데 금식기도를 했다. 시름시름 주저앉아갈 무렵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스럽게 여기는 게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아들이었다. 사진을 품고 다니면서 보고 또 봐도 싫증 나지 않는 게 아들 사진이었다. 반면 하나님은 그저 멀리 계신 분이고 나의 필요를 도와주시면 좋을 신(神) 정도였다.
또다시 나의 문제였다.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이 계명의 강도가 우리 생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음을 절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내가 정말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이었다. 마음으로부터 정리가 쉽지 않아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살려고 결심까지 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마음에 없는 거리감까지 만들었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제일 우선에 두는 삶을 살아보려고 무척이나 몸부림쳤다. 마치 하나님을 시험하듯이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합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좀 봐 주세요’ 하는 식이었다.
시험당한 아브라함을 생각해봤다. 그는 모리아산에 아들을 바치러 갔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6~7)
앞이 꽉 막혀 길이 보이지 않던 시절, 이 기막힌 상황을 아브라함 입장에서 묵상하고 또 묵상했다. 이 이야기를 지금 돌아보는 것은 이 벽을 넘고 나서 목회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들의 생명보다 중요시한 예배
아들을 데리고 시골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없는 교회였다. 예배 중 갑자기 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단에서 뭔가 하고 둘러보는데 아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어’ 하고 일어서려다가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예배 시간에 아들을 도우러 가는 게 옳은가, 예배를 드리는 게 옳은가.’
그 순간은 생명을 건 절박한 결단의 시간이었다. 운명 같은 선택의 순간 ‘주님, 예배를 지키겠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저 아이의 생명을 주님께서 지켜주소서’라고 고백했다. 말은 쉽고 간단하지만, 그 순간은 정말 길고 길었다. 예배는 긴박하게 끝났고 아들은 누군가에게 안겨 예배당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때 스쳐 가는 음성이 있었다. “아들을 거꾸로 들라. 아들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아들의 등을 힘껏 두드리라.” 경황없는 그 순간 내 마음에 울려온 음성이다. 왜 그러는지 모르게 그렇게 따라 했다. 아들은 입술이 하얗게 되고 부르르 떨면서 숨이 멎어 있었다. 입을 간신히 벌리고 손가락을 목구멍 속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뭔가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것 같았다. 힘을 다해 찔러 버렸다. 그 순간 목에서 뭔가가 퉁겨져 나왔고 피가 왈칵 쏟아졌다. 동전에 목이 막힌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가 살아났다.
시험을 그렇게 하셨다. 지금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요한복음 21장을 기억하며,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마음을 늘 잊지 않으려 힘을 쓰고 있다.
사역하다가 느슨해질 때면 스스로 마음을 조인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절대 내게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날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아픔도 많고 주변에서 야속하단 원망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이 길이 최선의 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