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사랑, 자기초월의 힘

입력 2019-06-27 00:04

“요즘 애들은 참 이기적이야. 자기밖에 몰라.” 이런 이야기를 한번쯤 해보았다면 이미 기성세대일 것이다. 하긴 기원전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의 문서에도 ‘요즘 애들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말이 있다 하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대 차이는 보편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기심’으로 말하자면 이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물론 모든 생명체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다. 자기 보존의 욕망이야 본성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본성에 더하여 ‘제도적 감정’을 가지는 동물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제도적 규제나 기대를 내면화하고 이를 학습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생기는 ‘공동성향’ 말이다.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이를 ‘문화의 패턴’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후기근대(late-modern)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공동성향으로서의 ‘이기심’을 문화의 패턴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적어도 나의 관찰은 그러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기심은 한 개인의 인성이라기보다는 제도적 감정이 더 크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의 젊은이들이 아닌가. 우정이나 사랑도 서로 마주 보는 순간이 있어야 생기는 법인데, 태어나서 줄곧 한 줄로 달리느라 남의 뒤통수만 보고 살아왔다. 일찌감치 토머스 홉스는 근현대 사회의 ‘자리다툼’이 이런 방식일 것을 예측했다. 하여 ‘눈앞에 아무도 없는 것은 영광’이요 ‘앞사람을 계속 앞지르는 것은 기쁨’이라고, ‘다른 사람 뒤에 있는 것은 수치’요 ‘넘어지는 것은 울어버릴 상황’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가 제안한 법치적 군주제는 해결책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근현대 사회의 작동방식을 분석한 부분은 예리하다고 본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가 이제 도래했다.

이런 시절에 사랑이 가당키나 한가? ‘1인 문화’는 어쩌다 그냥 도래한 것이 아니다. 스펙 한 줄 더 넣기 위해 점심시간도 반납하고 달리는 청춘들에게는 함께 만나 깊이 있는 사랑을 나눌 시간이 없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을 “합류적 사랑(confluent love)”이라 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서로 시간이 맞을 때만(그러니까 합류 기간 동안만) 하는 사랑이다. 사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회의적이다. 그 사랑은 지극히 ‘나’ 중심의 연합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혼의 유무, 연합 기간의 길고 짧음은 합류적 사랑을 규정하는 기준이 아니다. 나에게 유익이 될 동안만, 내가 너를 향해 감정이나 열정을 가지고 있는 동안만, 내가 시간이 있을 동안만 하는 사랑이 합류적 사랑이다. 물론 젊은이들만을 탓할 수는 없다. 사랑에 빠져서 나 아닌 다른 이를 돌보게 된다거나,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내 경력의 진로를 조정하는 것은 생존 경쟁의 트랙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을 의미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사랑은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의 본질을 가져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이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믿기에 사랑의 본질은 ‘자기 초월’의 힘이다.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한다면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기꺼이 너를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와 자산을 내어주고 감정과 생각마저도 바꾸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불리하다고, 혹은 ‘케미’가 그쳤다고 다시 각자 갈 길 가버리는 사랑은 ‘너를 향한 자기 초월’이 없다. 사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 땅으로 내려오신 것이라 믿는다. 니들이 와라, 그렇게 저 위에서 손 놓고 기다리시지 않고, 역사 안으로 사람들의 삶 안으로 뛰어 들어오신 거다.

어디 연애뿐이랴.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 본 사람들도 필시 동의할 거다. 그 작고 여린 생명이 내 품 안에서 꼼지락거릴 때부터 이미 나는 이전의 나를 초월하기 시작하지 않았나. 그게 사랑의 속성인데, 이기적이어야 산다고 말하는 오늘날의 제도 안에서 사랑의 힘이 그 자리를 잃고 있어서, 초조하다. 불안하다. 온통 ‘나들’로만 가득한 세상이 될까봐. 우리가 영영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릴까봐. 그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에서 가장 먼 저 반대쪽에 있는 세상이기에.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