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마 친구야, 우리가 끝까지 함께 할게!” 지난해 봄부터 전국 교육현장에서 터져 나온 ‘스쿨미투’가 한국 사회에 던진 충격은 컸다. 전국 학교 80여곳에서 그간 참아온 성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 일반고와 외국어고, 특성화고를 가릴 것 없이 동시다발적이었다.
교육이나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여성 청소년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직접 일어섰다는 찬사가 나왔다. 일부 교사 사이에서는 스쿨미투 때문에 교권이 무너진다는 볼멘소리도 있었다. 평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 사건으로 한국의 교육현장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은 분명하다.
이런 가운데 전국 단위 청소년 페미니즘 단체 ‘위티(WeTee)’가 지난 8일 공식 출범했다. ‘스쿨미투, 말하기를 잇는 네트워크’를 표방하는 국내 최초의 청소년 여성주의 시민사회단체다. 이 단체의 최유경(18), 양지혜(22) 공동대표를 2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여성 청소년을 위한, 여성 청소년들의 단체
위티는 현재 서울과 경기도, 광주와 부산, 대구, 충청도 등에 12개 분회와 지부를 두고 있다. 단체 이름인 위티는 ‘우리는 10대 페미니스트(We Are Teenager Feminist)’, ‘10대 페미니스트와 함께(With Teenager Feminist)’라는 구호에서 따왔다. 대안학교 학생인 최 대표가 선거를 거쳐 공동대표로 취임한 것도 청소년이 주체여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결정한 일이다. 고등학생 나이대 회원들이 다수이고 가장 어린 회원은 중학교 1학년 나이인 2006년생이다.
이전까지 스쿨미투 집회를 주도해온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이 프로젝트마다 인원을 모으는 느슨한 연대체였다면, 위티는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정식 시민사회단체의 틀을 갖춰 출범했다. 청소년들이 이처럼 전국 단위 여성주의 단체를 조직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지난 2월 양지혜 대표는 청소년 활동가 백모(18)양과 함께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사전심의에 참석해 국내 스쿨미투 현황을 전하기도 했다.
양 대표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자유발언대 자리에 올랐던 여성 청소년들과 청소년 페미니즘 활동을 시작한 이래 관련 일을 계속해왔다. 성인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청소년 시각에서 바라본 페미니즘 관련 주제들을 논의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양 대표는 학교 안 청소년 사이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향한 관심이 늘어난 시기를 2017년 하반기쯤으로 기억했다. 그가 진행하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프로젝트에 학내 페미니스트 동아리를 운영하는 대안학교 학생들이 속속 참가하기 시작했다. 스쿨미투가 나온 뒤인 2018년 하반기부터는 일반 학교에서도 참가자가 늘었다. 최근에는 외국어고나 국제고 출신이 늘면서 참가자 범위가 넓어지는 추세다.
양 대표는 “처음에는 내가 학교에서 이런 일을 당해서 너무 화가 난다는 분들이 많았다”면서 “모임을 직접 운영하는 청소년들이 찾아온다는 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대표가 대안학교 인턴십을 통해 상근직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지난해 9월로 이와 비슷한 시기다.
스쿨미투, ‘말하기’를 잇기
변화의 시기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페미니즘 관련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와도 일치한다. 2017년 초등학교 교사인 최현희(37)씨가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듬해 1월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피해 고발에 이어 SNS상 익명의 학내 고발이 산발적으로 계속되다 3월 서울 용화여고를 시작으로 학교 이름을 공개하고 교사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스쿨미투 폭로가 이어졌다. 이후 같은 해 5월 고등학교 기숙사 불법촬영 사건을 거쳐 9월 들어 스쿨미투가 다시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성년인 스쿨미투 고발자 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한계가 분명하다. 경찰서에 직접 가해자를 고발하기 어렵고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쉽지 않다. 학내에서 쏟아지는 2차 가해는 홀로 견뎌야 한다. 학교 측이 성폭력 가해 사실을 익명으로 고발한 SNS 운영자를 색출하려 하거나 관련 대자보가 뜯겨 밟히는 일이 흔하다. 가해자 처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최유경 대표는 “결국 청소년들이 할 수 있는 건 ‘말하기’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고발자는 가해 교사의 공개사과를 받는 수준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공개사과에 이르는 과정도 너무나 험난해 그 이상을 요구할 여력 없이 지쳐버린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 2월 ‘학교 내 성희롱·성폭력 대응 매뉴얼’을 내놨지만 실제 교육현장에서 지켜지는 경우는 적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위티의 1차 목표는 이런 처지에 놓인 청소년들이 ‘말하기’를 계속하도록 돕는 일이다. 성인이 청소년을 대하는 ‘보호’의 역할이 아니라, 같은 청소년의 입장에서 비슷한 폭력에 노출된 당사자를 도와주는 역할이다. 이를 위해 ‘전국스쿨미투지원단’ 사업을 할 계획이다. 각 여성단체, 교원단체 등의 도움을 받아 스쿨미투 고발 뒤 후속대응과 심리상담, 법률지원을 한다. 또 스쿨미투 고발자들이 서로 힘이 되어줄 수 있도록 교류를 돕는 사업인 ‘말하기 시작한 우리는’도 준비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회원의 대다수인 단체의 특성상 위티의 활동은 제약이 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외고나 지역 학교의 경우 평일뿐 아니라 주말에도 정기적으로 만나기 어렵다. 시험기간도 학교마다 제각각이라 약속을 잡기 어렵다. 입시 일정에도 영향을 받는다. 부모가 활동을 반대해 차비가 없어 모임에 못오는 경우도 있다. 이 단체는 회비를 받지 않은 채 후원으로만 운영한다. 청소년인 회원들의 부담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다.
양지혜 대표는 “일단 청소년들이 직접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또 이를 뒷받침할 구조를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저희에게 연락이 오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일상에서 접하는 성차별이나 폭력을 말하고 싶어한다”면서 “오프라인 공간에서 이런 고민을 청소년들이 함께 말할 수 있도록 하고, 더 나아가 이 목소리를 정치의 목소리로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