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돼지갈비를 먹을 때에 당장 그 돼지갈비에 대해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예전에 먹었던 다른 식당의 돼지갈비에 대해 품평을 하거나 앞으로 먹을 예정인 스테이크에 대해 갈망의 대화를 한다. 워낙 가볍게 지나가는 일이라 내가 그랬나 싶을 것인데, 이제 이 글을 읽었으니 나중에 돼지갈비를 먹으며 그 언젠가 먹었던 또 다른 돼지갈비에 대해 품평하거나 앞으로 먹을 스테이크에 대해 미리 환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쉬울 것이다.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은 이미 확보한 쾌락이다. 식탁에 놓인 음식은 곧장 내 즐거움이 된다. 인간의 뇌는 이 정도의 쾌락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상상의 음식 쾌락을 만들어 실재의 음식 쾌락을 증폭시킨다. 돼지갈비를 입에 물고 “그때 그 집 돼지갈비 기억나? 죽음이었지” “논현동에 새로 스테이크집이 문을 열었는데 말이야, 육즙이 폭발을 한대” 같은 말로 자신의 뇌를 자극한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며 그 언어로 상상의 세계 나아가 상징의 세계까지 창조해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는 성경 구절을 나는 인류 문명의 탄생이 곧 언어의 탄생임을 깨달은 고대 인간의 기록임을 믿는다. 언어의 발생 과정이 어떠하든, 인간은 언어에 붙은 그 무엇들에 자극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 언어만으로 즐거움이 생기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데 언어는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속이는 작업에도 동원이 된다. 별식으로 치킨밖에 먹을 수 없는 특별난 한국적 상황을 숨겨서 내 앞에 놓인 치킨을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그거 알아?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제일 많이 먹는 게 치킨이래. 한국 치킨이 세계에서 제일 맛있대” 같은 말을 나눈다. “세계 여러 나라 닭보다 한국 닭이 작아. 밀식 사육 탓도 있고, 치킨을 마리당 파니까 크게 키울 필요가 없어. 닭이 작아 살 맛이 안 나고, 그러니 양념법이 다양해진 거야. 다양한 양념에 외국인들이 흥미로워하는 것은 맞아”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당장에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맛없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금기를 깨는 사람은 욕을 먹을 뿐이다.
자식들이 어릴 때의 일이다. 가족 외식을 하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막내가 내게 주의를 주었다. “아빠, 조용히 해!”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 시험 성적 같은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내가 조용히 해야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였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막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맛없다고 툴툴거리지 말란 말이야.”
그때에야 내가 식탁에서 하는 직업적 버릇을 알게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식당 평가에 들어간다. 입구에서의 안내는 어땠고 식탁의 청결은 어떠며, 심지어 음악과 조명을 따진다. 음식이 놓이면 입에 대기도 전에 재료의 질이며 그릇과의 조화에 대해 품평한다. 이를 머릿속에서 하면 되는데, 혼잣말로 구시렁거린다.
내가 원래 평소에 구시렁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내 취재 방법이 그렇다. 메모하지 않아도 일단 말로 만들어 뱉으면 그때의 상황이 오래 기억되어 나중에 글로 쓸 때 도움이 된다. 아이들은 나의 이 구시렁거림을 수도 없이 들었던 것인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구시렁거림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었고, 결국엔 경고를 먹은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가족 외식은 물론이고 그 어떤 식탁에서든 품평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탁에 놓인 음식에 대해 그 어떤 말이든 해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이러고 만다. “저는 프로입니다. 돈을 받지 않는 자리에서는 품평하지 않습니다.” 음식 품평은 내 직업이다. 음식이 맛있게 느껴지도록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 아니다. 서로 불편하지만 나는 내 직업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먹방은 상상의 음식 쾌락을 전달하는 영상물이다. 내 앞에 놓인 실재의 음식 쾌락을 증폭시키는 용도에 적합하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음식이 당장에 내 앞에 놓여 있는 음식과 달라도, 다르면 더욱, 우리 뇌에 깊은 자극을 준다.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도와준다. 내 앞에 놓인 맛없는 음식을 당장에 더 나은 음식으로 바꿀 수 없으면 먹방이라도 보며 버텨야 한다. 위장 전략도 삶의 한 방법이다.
황교익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