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대학 휴교령에 파출소 허가 받아 ‘화요모임’

입력 2019-06-26 00:05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왼쪽 첫 번째)가 1981년 한국밀알선교단 수련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국밀알선교단 출범 초기 가장 중점을 뒀던 일은 화요모임이었다. 단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고 아직은 장애인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장애인을 잘 이해하도록 교육하는 게 필요했다. 2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교육 시간을 네 분야로 나누고 세부 교육진행 사항을 수차례에 걸쳐 검토했다.



(포털사이트에서 영상이 노출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첫 번째 분야는 신앙교육이었다. 예배와 성경공부로 구성됐고 교재는 내가 직접 만든 것과 잘 알려진 성경공부 교재를 병행 사용했다. 둘째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교육이었다. 매주 장애 영역별로 전문가를 초청해 해당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개인 뜻에 따라 점자 혹은 수화를 배우게 했다. 셋째는 기도회였다. 그때그때 필요한 사안을 놓고 모든 단원들이 합심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은 친교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교집합으로 모였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각자 맡은 사역에서의 어려움이나 보람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1981년 인천 농아학교 전도활동 당시 특강을 하는 모습.

처음 몇 달 동안 화요모임은 연합세계선교회 사택에서 진행됐다. 창립 일주일 뒤 열린 첫 모임에는 특강을 하기 위해 온 강사까지 12명이 참석했다. 첫 화요모임을 마친 뒤 사흘 후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대학엔 휴교령이 내려졌다. 거기에 오후 10시 통행금지까지 실시되는 바람에 이제 막 발돋움을 시작하는 밀알 모임에 큰 장애물이 됐다. 두 번째 화요모임부터는 인근 파출소에 집회 허가를 받아야 했고 모임 시간도 1시간으로 줄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임엔 꾸준히 8~12명이 참석하며 토대를 다졌다.

밀알에 닥친 첫번째 위기

첫 번째 위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찾아왔다. 창립 2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매우 심각한 갈등과 회의에 빠지게 됐다. ‘혹시 밀알을 잘못 시작한 것은 아닐까. 내게 이 모임을 이끌어갈 만한 능력이 부족한 걸까. 꼭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극도로 지치게 했다. 경험도 부족한 시기였고 아직은 밀알의 문제를 털어놓고 의논할 만한 동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곁에 있는 동지들이 사명감과 애정을 갖고 평생 해야 할 일로 참여했다기보다는 잠깐 나를 돕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바로 그게 문제의 핵심 원인이었다. 밀알 사역에 단 한 번 참석했더라도 진심으로 고맙다. 그들이 그 시간 바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쌓여서 밀알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누구나 다 밀알 사역에 목숨을 걸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과 형편이 허락되는 어느 시점에 잠시 참여해 봉사를 하다가 개인 사정이 생기면 중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 진지하게 장애인 관련 사역을 해 볼 마음으로 왔더라도 와서 보니 밀알이 하는 방법이나 방향이 본인과 맞지 않을 때 역시 중단하고 그만둘 수도 있다. 단 한 번이든 한두 달 간이든 그 모든 사람들의 참여가 계속 릴레이처럼 이어져 밀알의 역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 모든 사람들은 밀알의 공로자들이며 보석처럼 빛나는 밀알의 벽돌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가질 만큼 나는 성숙해 있지 못했다. 약속을 해 놓고도 잘 안 나오는 것에 대해, 단원카드를 제출하고도 그만두는 것에 대해, 특히 임원을 맡아 놓고도 소홀히 하고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그저 섭섭하고 실망스러웠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사람이 무성의할까. 한번 마음을 먹었으면 6개월은 가야지, 아니 한 달이라도 가야지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그만둘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괜히 사람이 미워지기도 했다. 그 미움이 마음에 상처가 되고 못 견딜 만큼 아팠다. 그리고 나의 무능으로 결부돼 더욱 괴로웠다. 혹시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경제적 어려움까지…“하나님 뜻대로”

무렵 내게 닥친 어려움 중 또 다른 한 가지는 환경적인 문제였다. 휴교령으로 인해 기숙사에서 10월 말쯤 쫓겨나야 했을 때 역시 1년 전처럼 갈 곳이 문제가 됐다. 이 친구 집에서 며칠, 저 친구 집에서 며칠, 그런 식으로 지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긴 겨울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다 아직 해결하지 못했던 등록금 문제 등 언제나 나를 괴롭혔던 경제적 어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미해결 과제였던 사안들이 밀알을 시작한 그해 연말 동시에 나를 압박했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을 위해 밀알 사역을 한다는 것이 사치스럽게만 생각됐던 것이다.

만일 내게 신앙이 없었다면 그 위기를 극복해 밀알을 계속 이끌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했던 시간들이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특히 밀알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결코 우연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마치 내 자신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속단하며 행동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렸다. 중단을 원하시면 하나님이 중단시키실 것이고 발전을 원하시면 하나님이 발전시키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견디기로 했다.

이재서 박사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