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도피생활 21년 만에 붙잡혀 22일 국내로 송환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54·사진)씨는 고교 동창의 신상정보, 대만계 미국인과의 위장결혼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신분을 세탁하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2007년 이후 행적을 감춘 아버지 정 전 회장 행방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이고 있다.
23일 대검찰청 국제협력단(단장 손영배)에 따르면 정씨는 한보그룹 자회사 동아시아가스(EAGC) 회사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1998년 6월 검찰 조사를 받은 이후 잠적했다. 그가 받은 혐의는 1997년 11월 동아시아가스가 보유한 주식 매각자금 322억원을 빼돌려 스위스 비밀계좌에 숨겼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정씨에 대한 구속영장도 발부됐지만 그를 찾지 못해 집행하지 못했다. 해외 밀항으로 추정됐지만, 이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검찰은 공소시효가 임박해지자 2008년 9월 정씨를 특경가법상 횡령과 재산국외도피 혐의로 일단 불구속기소했다. 그러나 재판 역시 정씨 없이는 진행이 될 수 없었다.
막막한 상태였던 정씨 소재 추적은 2017년 방송에 정씨가 미국 체류 중이라는 인터뷰가 나온 것을 계기로 변화를 맞았다. 검찰은 2018년 8월 아내와 자녀들이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 중인데 정씨 고교 동창인 류모씨가 캐나다 거주를 후원하는 식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류씨는 정작 한국에서 다른 이름으로 개명한 채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의심한 검찰은 류씨 이름을 이용한 영주권 시민권 관련 자료 등을 조사한 결과 정씨가 류씨 이름으로 캐나다와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영문 이름을 ‘Daniel Seung’ ‘Seung’ ‘Daniel’ 등으로 약간씩 바꿔 모두 네 차례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2011년에는 대만계 미국인과 결혼해 ‘LIU, Sean Henry’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사실도 파악됐다. 그는 중앙아메리카 국가 벨리즈의 시민권자 행세도 했다.
도피 중인 정씨 신분을 파악한 검찰은 그가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에콰도르에 입국한 사실을 알고 송환을 시도했다. 에콰도르와는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아 강제 송환이 어려워지자 검찰은 에콰도르 내무부에 강제추방 방식의 협조를 요청했다. 지난 18일 정씨가 미국 LA행 출국을 시도한다는 정보가 검찰에 전달됐다. 검찰은 미국 국토안보수사국 파나마지부의 협조를 통해 경유지인 파나마 국제공항에서 정씨 신병을 확보, 두바이를 거쳐 국내로 송환했다. 신병 확보에서부터 국내 송환까지는 57시간이 소요됐다.
정씨는 아버지 정 전 회장이 지난해 사망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술대로라면 정 전 회장은 95세로 사망한 게 된다. 검찰은 진위를 확인 중이다. 정 전 회장은 한보사태와 관련해 2002년 12월 특별사면받았지만 이후 특경가법상 횡령 등 혐의로 다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 도중 병 보석으로 석방됐고, 2007년 치료를 이유로 일본에 건너간 뒤 잠적했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검사 예세민)는 24일에도 정씨를 다시 불러 구체적인 도피 경로 등을 추궁할 예정이다.
조민영 구승은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