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유지? ‘상산고 후폭풍’에 시험대 오른 ‘문재인표’ 교육

입력 2019-06-24 04:02
상산고등학교 동문과 학부모들이 상산고의 자율형사립고 재지정 취소가 발표된 지난 20일 전북 전주시 전북교육청 입구에서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자율형사립고(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려는 교육 당국의 방침에 제동이 걸렸다. 전북교육청이 상산고의 자사고 지위를 박탈하려 하자 전북에 지역 기반을 둔 여야 정치인들이 발끈했고 최종 결정권을 쥔 교육부가 움찔하는 모습이다. 결국 청와대와 교육부가 상산고의 자사고 유지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올해 재지정 평가를 받는 자사고는 24곳이다. 상산고·안산동산고(경기)는 탈락했고 광양제철고(전남)는 통과했다. 나머지 21곳도 탈락할 경우 강력한 투쟁을 예고한 상태다. 이들은 상산고 사례처럼 지역 정치권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교육계에선 올해 일반고로 전환되는 자사고가 6~7곳에 그칠 것이란 시각도 있다.

교육 정책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었던 자사고 폐지 정책이 물 건너가면 교육정책 전반에 적지 않은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먼저 ‘영재학교·과학고→외고·자사고·국제고→일반고’로 공고해진 고교서열 체제를 약화시키지 못하게 된다. 고교서열 체제는 ‘입시명문고=명문대 진학’이란 공식을 강화시켰고 사교육의 저연령화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부 입시 전문가들은 “고교서열 체제와 고교 입시에 손대지 않고는 초등 사교육을 잡기 어렵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문재인정부 교육분야 핵심 정책인 고교학점제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고교학점제는 고교 내신 성적을 절대평가로 전환해야 도입이 가능하다. 현재의 고교서열 체제를 약화시키지 않고 고교 내신을 절대평가로 전환해 대입에 활용하게 되면 자사고 특목고 등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자사고 등에 지원하는 학생·학부모들의 최대 고민은 내신 성적 하락이다. 절대평가 전환으로 이런 고민을 덜면 자사고 등의 인기는 더욱 치솟고 입시 사교육 연령이 더욱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고교학점제를 추진하려면 일반고의 경쟁력이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공고한 고교 서열구조 속에서 일반고 지원 정책은 ‘밑 빠진 독’이 될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경기 지역의 한 일반고 교감은 “학업 의지가 높은 학생은 특목고 자사고로 먼저 빠져나간다. 교사들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다. 학생은 패배의식을 갖고 고교 생활을 시작하는데 ‘일반고 살리기’는 먼 나라 얘기”라고 꼬집었다.

문재인정부의 교육 정책이 뒤틀리기 시작한 시점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전 과목 절대평가 추진부터였다. 문재인 대선 캠프에서 교육정책을 입안한 전문가들은 수능의 힘을 빼 고교 교실을 정상화시킨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고교서열 체제 개선, 사교육비 감소, 고교학점제 같은 정책과 밀접하게 엮인 정책이었다.


그러나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에서 제동을 걸었다. 학부모 반발이 크다는 이유였다. 동시에 학생부위주 전형(학생부종합·교과)의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다. 정부는 교육부-국가교육회의-공론화위원회-시민참여단-교육부로 하청·재하청하며 책임 떠넘기기를 했다. 결국 ‘정시 30%룰’(모든 대학은 수능 위주 정시모집으로 입학생의 30%를 뽑도록 권고)이란 어정쩡한 결론을 내고 덮어버렸다.

정시 30%룰은 자사고나 특목고 등에 ‘꽃놀이패’를 쥐어준 것이란 분석이 있다. 자사고에 진학한 학생이 내신 성적이 좋으면 학생부 전형에, 내신이 나쁠 경우 수능에 집중하면 되는 환경을 만들어줬다는 주장이다. 즉 수능과 자사고 정책은 개별 사안이 아니라 민감한 교육 이슈들이 얽힌 퍼즐 조각 가운데 하나다. 수능의 힘을 빼 고교 교실을 정상화하고, 고교학점제를 통해서 공교육 경쟁력을 높이고 사교육비 부담을 낮추는 등의 전반적인 정부 로드맵이 하나둘 어그러지고 있다는 얘기다.

국가교육위원회 출범과 지방분권 의지도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정부는 교육 행정을 세 갈래로 개편하려고 한다. 국가교육위를 출범시켜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는 장기적 비전과 계획을 실행하는 게 한 축이다. 국가교육위에는 대입 정책과 국가교육과정 개편 기능이 넘어간다. 초중등 분야의 권한은 시·도교육감에게 이양하고 교육부는 손을 뗀다. 교육부는 고등·평생교육을 담당하고 사회부총리를 보좌하는 역할을 강화하려는 구상이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고 국정과제여서 공들여 추진되고 있다.

‘상산고 구하기’에 나선 정치권의 압박은 상당하다. 민주평화당 정동영(전주병) 조배숙(익산을) 김종회(김제·부안) 유성엽(정읍·고창) 의원은 공동성명을 내고 전북교육청을 비난하고 교육부에 ‘부동의’ 결정을 촉구했다. 국회의장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의원, 바른미래당 정운천(전주을) 의원,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까지 동참했다. 오는 26일 국회 교육위원회가 소집돼 상산고 등 자사고 문제를 다룰 가능성도 있다. 내년 총선 출마가 유력한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버티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교육부 안팎에서 흘러나온다.

만약 교육부가 전북교육청 평가를 문제 삼아 상산고 지정 철회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교육의 정치적 중립과 지방분권화에 역행한 선례로 평가될 수 있다. 교육부는 상산고 평가 결과가 발표된 지난 20일 이전에는 ‘교육청 평가를 존중하겠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정치권 반발이 거세지면서 ‘전북만 평가 기준이 80점인데 다른 교육청(70점)과 형평성에 어긋나는지 들여다본다’며 기류 변화를 보였다.

이번 자사고 사태를 계기로 교육계에서는 정치인 입김에 휘둘리지 않는 국가교육위의 필요성이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여론에 거스르는 ‘마이웨이’를 고집하는 국가교육위가 위험하게 여겨질 수 있다. 국가교육위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진보성향 교육계 인사가 주로 포진할 것으로 예측된다. 전교조 등은 자사고를 ‘특권 귀족학교’로 규정하고 있다. 만약 교육부가 아니라 국가교육위에 자사고 지정 철회 동의권이 있었다면 정치권의 상산고 구하기는 어려울 수 있었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