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훈 NH농협은행장은 지난달 24일 본사 직원 가족 30여명과 저녁식사를 했다. 매월 직원들과 소통하기 위해 만든 ‘은행장과 함께’라는 행사인데, 이날은 조금 특별했다. 며칠 뒤 그날 식사를 했던 직원의 어린 자녀들로부터 10여통에 이르는 손편지를 받아서였다.
아이들은 편지에서 ‘은행장’ 대신 ‘할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랑 저녁식사를 마치고 함께 집으로 와서 좋았어요” “나중에 커서 농협은행에서 일하고 싶어요”라고 썼다. 이 행장은 일일이 답장을 써주며 “직원과 소통하는 자리를 앞으로 더 만들겠다”고 했다.
은행장들이 혁신을 위해 파격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은행장 호칭 대신 별명으로 불러 달라고 하는가 하면, 만나고 싶다는 직원 이메일을 받자 직접 영업점을 찾는다. 수행비서를 없애고 직접 일정을 관리하기도 한다. 권위를 벗어던지고 유연하게 변화하는 게 디지털 혁신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는 금융권에 시급하다는 인식이다.
이 행장은 지난 19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NH디지털캠퍼스에 집무실을 따로 마련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본사가 아닌 NH디지털캠퍼스에서 근무하기로 했다. 이곳에선 ‘은행장’이 아닌 ‘디지털 익스플로러(Digital Explorer)’란 별칭을 사용한다. 편안한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직원과 책상까지 공유한다. 디지털 혁신을 독려하기 위해 현장에서부터 활발하게 소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손태승 우리은행장은 지난해 12월부터 ‘채움멘토단’을 운영하고 있다. 책임자급 이하 직원 12명으로 구성된 멘토단은 매월 영업현장의 목소리를 손 행장에게 전달한다. 이른바 ‘역멘토링’이다. 소통의 무대는 중앙과 지방을 아우른다. 지난해 12월엔 입사 1년 차인데도 우수행원으로 뽑힌 대구 평리동지점의 한 행원이 “지점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내자 대구로 내려가 직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진옥동 신한은행장은 ‘형님 리더십’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직원들의 수고나 성과를 알리고 싶어한다는 점 때문에 ‘형님’으로 불린다. 진 행장은 수행비서를 두지 않고 운전기사 1명만 두고 있다. 수행비서가 없다 보니 수많은 일정을 직접 관리하면서 혼자 움직인다. 주52시간 근무제 도입에 맞춰 운전기사를 먼저 퇴근시키고, 직접 차를 몰며 일정을 소화한다.
은행장들의 탈권위 행보는 혁신의 절박함 때문이다. 조직문화도 수평적이고 유연하게 바꿔야 진정한 혁신이 이뤄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23일 “여러 신생 핀테크 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인데, 규모가 큰 은행 조직일수록 변화가 어려워 흐름에 뒤처지기 쉽다”며 “유연한 소통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다급함이 은행권에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일부에선 관리자급 직원과 신입직원 간의 공존을 위한 ‘속도조절’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금융업은 재산을 다루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엄격한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무작정 수평적 조직을 만들 수 없다”면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반 출생) 신입직원의 창의성을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기존 질서에 익숙한 관리자급 직원들이 공존할 수 있는 조직문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조언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