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이현세(65)는 현재 백수다. 그는 지난해 11월 화실에서 동고동락하던 직원을 전부 내보냈다. 작품 활동도 사실상 접었다. 최근 서울 서초구에 있는 화실에서 만난 그는 근황을 묻는 말에 “놀고 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이제 좀 쉬엄쉬엄 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남은 작가 생활이 얼마나 될까 계산하니 10년 정도더군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하려고 세상에 왔는가, 즐기려고 왔는가.’ 남은 10년은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 화실을 정리한 것도 그래서고요. 화실을 유지하려면 작은 밥벌이라도 계속해야 하니까(웃음).”
이현세를 만난 건 최근 완간된 어린이 학습만화 ‘이현세의 그리스 로마 신화’(녹색지팡이·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모두 10권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서양 문명의 출발선을 살필 수 있는 역작이다. 이현세는 그동안 학습만화 시리즈 ‘한국사 바로 보기’ ‘세계사 넓게 보기’ ‘삼국지’를 펴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른바 ‘이현세 역사 4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인 셈이다. 이현세와의 인터뷰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됐다.
-학습만화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웃음). 과거 ‘천국의 신화’를 그리면서 역사 공부를 많이 했다. 그때 보니 내가 아는 역사와 ‘진짜 역사’가 다르더라. 그래서 한국사 바로 보기를 출간했고, 세계사도 다뤄보자는 생각에 세계사 넓게 보기를 펴냈다. 그다음엔 삼국지를 그렸다. 동양→서양→동양 순으로 역사를 다룬 셈이니 마지막엔 서양에 관한 이야기, 그중에서도 서양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려보고 싶었다.”
-이미 서점가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책이 수백 권이나 된다.
“많은 작품이 이미 출간돼 있지만 내 책보다 그림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다. 손과 눈이 버텨준 덕분에 끝까지 그릴 수 있었다. 좀 더 장황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었지만 그림의 ‘커트’를 잘게 쪼개고 싶진 않았다.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했다. 그렇다 보니 빠진 내용이 제법 있지만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왜 학습만화 시장에 뛰어들었나.
“재판이 끝나고 나니 내 나이가 쉰 살이었다(이현세는 1990년대 중반 저서 ‘천국의 신화’가 음란하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송사에 휘말렸고, 2003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제대로 된 작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만화 시장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인터넷 만화’로 주도권이 넘어간 상태였다. 이현세는 알지만, 이현세의 만화는 본 적이 없는 세대가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상황이었다. 다시 내 자리를 찾으려면 나를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제 부모 세대가 된 사람들이 원하는 만화를 그려야 했다.”
-원래 그리던 창작만화에 대한 갈증이 컸을 것 같은데.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이 물론 있었다. 학습만화라는 게 보람이 크지만 작가로서는 지루한 측면도 없지 않다. 작가로서의 삶을 너무 쉽게 살아버린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든다.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50대와 60대를 그냥 흘려보내버린 것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왜 웹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던 건가.
“작가의 자존심이었다. ‘공짜 만화’는 그리기 싫었다. 과거에 만화를 무단 복제하던 업체들이 이런 광고 문구를 사용하더라. ‘지금도 만화를 돈 주고 보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린 만화를 누군가에게 공짜로 보여주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웹툰 시장에 참전했다면 성공했을 것 같나.
“힘들었을 거다. 지금 젊은 독자의 감성을 나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포털 사이트에서 인기 있는 웹툰들을 쭉 보니 이들 작품에 왜 독자가 열광하는지 모르겠더라. 젊은 독자를 위해 내 가치관을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가난하더라도 나의 팬들과 함께 늙어가고 싶었다.”
-올해는 이현세 만화의 아이콘인 까치가 탄생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까치를 처음 그린 건 79년 발표한 ‘최후의 곡예사’를 통해서였다. 까치가 인기를 끈 이유는 시대가 원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10대와 20대에게 로봇처럼 순종할 것만 강요하던 시기에 까치는 태어났다. 까치는 청춘들에게 더 먼 곳을 바라보라고 말한 캐릭터였다.”
-만약 까치가 실존 인물이라면 지금 어떤 중년의 남성이 됐을까.
“아마 요절했을 것이다. 까치는 모든 타협을 거부하는, 철이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영원한 청춘’일 수밖에 없는 남자다. 평범한 중년 남성으로 성장할 순 없었을 것이다.”
-동시대 만화가 누구보다 굴곡진 시간을 보냈다. 가장 후회되는 건 뭔가.
“애니메이션 ‘아마게돈’(1996)이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90년대 중반은 애니메이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대기업들도 이 사업에 뛰어든 시기였다. 그 정점에 있던 작품이 아마게돈이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망했다. 48억원을 투자했는데 회수한 금액이 8억원 정도였다. 당시까지 한국영화 역사에서 가장 적자를 많이 본 작품이었다.”
-왜 실패했을까.
“이때 나는 신문에 ‘남벌’을 연재하고 있었다. 아마게돈보다는 남벌에 집중했다. 그땐 몰랐다. 아마게돈이 얼마나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중요한 기점이 될지. 만약 아마게돈에 집중했다면, 그 작품이 성공했다면,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규모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모든 게 내 잘못은 아니지만, 잘못의 ‘시작점’에 내가 있었다고 할 수는 있을 듯하다.”
-작가 생활이 10년 남았다고 말했는데, 앞으로 10년간 무엇을 할 건가.
“아마도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그릴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이젠 사라져버린 것을 그려보고 싶다. 화실까지 정리했으니 과거와는 다른 작업이 될 것이다. 스토리 중심으로 가면서 삽화를 조금씩 곁들이는 형태가 될 수도 있겠다. 확실한 건 이제 좀 놀면서, 즐기면서 일하고 싶다는 거다.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내가 즐거울 수 있는,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다.”
▒ 이현세는 누구?
포털 사이트에는 1956년생으로 기재돼 있지만 사실은 54년생이다. 그는 “수정을 요청하면 고쳐주겠지만 굳이 그런 부분까지 신경쓰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경북 경주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다. 미대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색약 판정을 받아 화가의 꿈을 포기했다. ‘대체재’로 떠올린 게 만화였다. 만화의 세계에서는 흑백만으로도 원하는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었다. 82년 ‘공포의 외인구단’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최고의 만화가로 거듭났다. 당시 전국 곳곳에는 이 만화의 주인공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까치 만화방’이 생겨났다. 97년부터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을 지냈으며, 2016년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