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약 8개월 만에 한·일 양국 기업이 낸 출연금으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해법을 내놓았다. 일본이 이 안을 수용하면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외교적 협의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피해자들도 강제동원 문제의 종합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는 우려를 나타내 이 방안이 현실화될지는 불투명하다. 정부가 다음 주 한·일 정상회담을 의식해 설익은 안을 서둘러 발표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외교부는 19일 이런 내용을 담은 ‘강제징용 판결 문제 우리 정부 입장’을 발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외교 경로를 통해 일본 측에 이런 입장을 전달했다”며 “일본 측의 진지한 검토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이 지난 주말 일본을 비공개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한·일 간 물밑 협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이날 “한국 정부의 해법은 국제법 위반 상황을 시정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일본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이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주는 것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양국의 법적 기반이 훼손되지 않게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NHK가 보도했다.
정부는 이런 구상을 일본에 제안하면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나 국내 기업들과도 따로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부안이 현실화되려면 피해자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기업들의 자발적 참여가 전제돼야 하는데 현재로선 어느 것도 정해진 게 없는 상태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대리인단 및 지원단은 “정부 입장이 절차적인 면에서나 금전적 배상 측면에서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다만 한·일 간 협의를 개시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면서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아직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강제징용 피해자가 수십만명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만약 일본이 제안을 수용한다면 일본에서는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 등이, 한국에선 포스코 등이 재원 조성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 중 한 사람이라도 일본 정부의 배상을 받겠다고 하면 한국 정부가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정부안은 우선 배상 판결을 받은 피해자 14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정부의 발표는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이 때문에 오는 28~29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계기 한·일 정상회담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날 한 행사에서 “다음 주말 일본 오사카에서 G20 정상회의와 한·중, 한·일, 미·중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린다”고 말했다. 다만 외교부 당국자는 “강제징용 문제와 한·일 정상회담 개최 여부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에 따른 절차를 계속 진행한다는 입장이다. 가나스기 겐지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이날 김경한 주일 정무공사를 청사로 불러 “한국이 기한 내 중재위원을 임명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청구권협정은 분쟁 해결 절차로 외교 경로를 통한 협의, 양국이 직접 지명하는 위원 중심의 중재위 구성, 제3국을 앞세운 중재위 구성을 두고 있다.
권지혜 이상헌 조민아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