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일간의 국회 파행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서울 여의도의 국회가 공전하고 있는 사이 의원들은 각자 지역구로 달려가 내년 4월 총선 준비에 몰두했다. 여당 의원들은 당직까지 마다하며 지역구 관리에 집중했고, 야당 의원들도 현장 밑바닥 민심을 모으느라 바빴다. 총선까지 아직 10개월이 남아 있지만 의원들의 마음은 이미 ‘표밭’에 가 있다.
지역구 챙기기 몰두하는 의원들
당장 비상이 걸린 건 PK(부산·경남) 지역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에서 선전하면서 민주당의 ‘동진 전략’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됐지만, 최근 들어 이곳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PK 지역의 한 민주당 의원은 28일 “국회가 열려도 특별한 일정이 잡히지 않으면 지역구에 머무르며 ‘지역 다지기’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이 어려우니 당직을 맡을 정신이 없다”며 위기 의식을 드러냈다. 서울과 지역구 일정을 둘 다 챙기느라 하루에 비행기를 세 차례나 타는 의원도 있다.
지역구와 국회의 거리가 가까워도 문제다. “멀지도 않은데 왜 안 보이냐”며 지역 주민의 원성을 사기 때문이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지역구에 가보면 ‘국회도 제대로 안 돌아가는데 와서 얼굴도 안 비춘다’고 욕을 한다”며 “이럴 때일수록 미리미리 지역구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내년 총선에서 문재인정부 심판론을 꺼내들 야당 의원들도 바쁘다. 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지역은 이미 총선 모드에 돌입했다”며 “지역에서 정부·여당의 실기(失期)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의 실정에 따른 어려운 경제 상황과 부동산정책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특히 많다고 덧붙였다.
실무를 담당하는 의원 보좌진도 상당수가 총선 준비로 의원회관을 비운 채 지역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한 야당 관계자는 “최근 의원실 보좌진 절반이 지역구로 내려가 숙소를 구하고 총선 대비에 들어갔다”며 “총선 전까지는 서울에 있는 집에 자주 가기도 어려워질 것 같다”고 토로했다.
총선으로 가는 길은 험로
총선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먼저 당내 경선을 통과해 당의 후보가 돼야 하고, 본선에서 다른 당 후보들과 맞붙게 된다.
민주당은 지난달 ‘모든 현역 의원은 원칙적으로 경선을 거쳐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총선 기본 틀을 마련했다. 경선이 원칙이다 보니 현역 의원 입장에선 새로운 경쟁자가 애초에 도전장을 내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사전 제압’을 하는 게 중요하다. 한 의원 보좌관은 “깜냥도 안 되는 후보가 나오면 경선 과정에서 분란만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압도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경선에 드는 비용도 아낄 수 있다.
경선의 핵심은 ‘당원 확보’다. 민주당 경선은 ‘권리당원 50%와 안심번호 여론조사 50%’ 비율로 선거인단을 구성해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중 안심번호(실제 휴대전화 번호가 노출되지 않도록 생성된 가상의 번호) 여론조사 대상은 특정하기가 어려워 사실상 권리당원 투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민주당은 오는 8월 1일 이전에 입당해 6개월간 당비를 납부한 이들만 선거권자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현역 의원들은 최대한 많은 권리당원을 확보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한 의원 보좌관은 “지역구에서 시·군·구의원은 물론 사돈에 팔촌까지 총동원해 당원 확보에 나서는 중”이라며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보훈 관련 단체를 열심히 찾아다니며 당원 모집에 발품을 팔았다”고 했다. 이 보좌관은 가정의 달인 지난달에는 노인정을 일일이 돌며 인사했다.
공천 룰 마련에 본격 착수한 자유한국당에서도 책임당원의 역할이 결정적인데, 책임당원으로 승격되는 요건이 ‘당비 3개월 납부’로 민주당보다 짧다. 따라서 내년 총선까지는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상당수 의원들은 벌써부터 지역구에서 당원 모집에 적극 나서고 있다. 입당원서를 수십장 받았다는 글을 SNS에 올리는 의원들도 있다.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선거법 개정안의 향배도 지역구 의원들을 긴장하게 하는 요인이다.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의석 배분에 따라 지역구가 어떻게 바뀔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구 기준 미달로 지역이 통폐합될 위기에 놓인 한 지역구 의원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일찌감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구가 합쳐질 가능성에 대비해 옆 지역구의 현안을 미리 파악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옆 지역구 의원이 관계기관에 우리 지역에 대한 질의를 요구했다는 얘기를 듣고 화를 냈다”고 말했다. 인접 지역구 의원 간 ‘영역 침범 논쟁’으로 기관들만 난처해진 상황이다. 지역구 자치단체장이 같은 당 소속인 경우 자연스럽게 인접 지역구 이슈까지 챙길 수 있어 유리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역구에 올인하는 것은 주객전도
지역구 의원들이 선거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국회의원 본연의 업무에 소홀해지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크다. 올해 국정감사가 총선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열리기 때문에 ‘부실 국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총선을 앞두고 열리는 국감은 평소보다 관심도가 떨어진다”며 “선거가 코앞이다 보니 국감을 빨리 해치워버리고 선거운동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의원들이 지역구 활동에만 매몰돼 국정 활동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박상병 인하대 교수는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이지 지역구만의 대표가 아니다”라며 “당에서도 지역구 활동을 정량평가 기준으로 삼을 게 아니라 의원이 가진 정치적 역량이나 지역을 뛰어넘는 리더십에 높은 점수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의원은 국민을 대표해 의정 및 입법 활동을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데 지역에서 선거 준비에만 몰두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성훈 이종선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