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배기 남자아이가 도시 근교 폐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시신 옆에는 빈 약병이 있었다. 병 속에 들어 있던 약을 잘못 먹어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 달 후, 인근에서 세 살 난 남자아이가 시체로 발견됐다. 목 졸린 흔적이 있었고 몸 여러 군데에 베인 상처가 있었다. 머리카락은 잘려져 있었고 성기도 절단됐다. 경찰은 목에 남은 손자국 특징을 살펴 범인이 어린이에 가까운 청소년이라고 판단했다. 이전 네 살배기 남자아이의 죽음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경찰은 주변을 대상으로 탐문한 끝에 11세 소녀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인형처럼 예쁜 여자아이였다.
재판 과정을 지켜본 심리학자들은 살인자가 아주 영리하고 사람을 교묘하게 조종하며 그 때문에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살인자는 재판 때 한 번도 살인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재판부는 시한을 정하지 않고 시설에 구금할 것을 선고했다. 9년간 갇혀 있던 살인자는 스무 살이 됐을 때 개방형 교도소에서 도망쳤다가 사흘 후 다시 검거됐다. 재수감된 지 3년 후 살인자는 석방됐다. 갇힌 지 12년 만이었다. 살인자는 아직 젊디젊은 23세였다.
석방되면서 살인자는 새로운 신원을 부여받았고 신상에 대한 비밀 유지를 보장받았다. 몇 년 후 그녀가 딸을 낳자 딸도 성인이 될 때까지 같은 보장을 받도록 조치됐다. 딸을 낳은 후 10여년이 지났을 때 살인자의 비참한 어린 시절이 묘사된 책이 출판됐다. 살인자가 살인 경험을 대가로 금전적 이익을 얻었다는 공분이 제기됐고 기자들이 그의 집을 찾아내자 살인자와 딸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이때까지도 살인자의 딸은 엄마의 과거를 몰랐다. 살인자는 딸의 신원 보호 기간을 사망할 때까지로 연장해 달라고 했고 법원은 이를 허용했다. 이른바 ‘메리 벨 결정(Mary Bell Order)’이다. 메리 벨은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소녀 살인범이고, 메리 벨 결정은 미성년 범죄자의 신원 보호와 관련해 중요한 선례가 됐다. 책 출간으로 한바탕 소동을 빚은 것을 제외하곤 메리 벨의 일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이혼을 했고 딸이 아들을 낳아 이제 환갑이 넘은 할머니가 됐다는 것만 전해진다. 손자도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덕에 조용하고 평범하게 누군가의 곁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국내에서도 소년법 개정 논의가 한창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끔찍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고 있어서다. 청소년 범죄자의 재사회화라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심각한 범죄에 대해서는 성인에 준하는 엄한 벌을 내려야 한다는 쪽에 여론의 힘이 실리는 듯한 분위기다. 피해자 입장에 더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나 그 가족의 엄벌 청원 등에 많은 이들이 호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보호를 받는 가해자들보다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하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지켜보며 안타깝다는 감정을 느끼는 건 인지상정이다.
몇 년 전 메리 벨의 딸이 아들을 출산했을 때 살해당한 한 소년의 여동생은 “아기의 탄생이란 축복할 일이지만 아기의 신원은 공개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메리 벨의 손자가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복수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자신이나 자기 아이들이 겪었던 고통을 헤아려 달라는 의미로 읽혔다. 실제 메리 벨이 살해한 두 소년의 가족은 신원 보호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죽은 두 소년과 가족은 대중에 개인정보가 낱낱이 공개됐고 소년의 형제들은 자라면서 가족에게 발생했던 끔찍한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메리 벨과 딸, 손자가 법의 보호를 받는 동안 피해자의 가족은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소년법 개정 논의 과정에서는 청소년 범죄의 피해자와 그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제대로 마련해야 한다. 청소년 가해자만 보호받고 피해자는 적절히 보호받지 못한다는 아우성이 계속 나온다면 소년법 개정 논의는 무의미하다.
정승훈 국제부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