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킨 ‘범죄인 인도 법안’ 개정을 사실상 무기 연기하면서 홍콩 사태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법안은 당분간 재추진은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캐리 람이 홍콩 시민들에게 ‘백기’를 든 셈이다. 2014년 홍콩 ‘우산혁명’을 강경 진압한 공로로 홍콩 행정수반에 오른 캐리 람은 다시 홍콩 시민을 힘으로 억누르려다 역풍을 맞고 정치생명까지 위기를 맞았다.
홍콩 시민들은 캐리 람의 송환법 연기 발표에도 16일 법안의 완전 철폐와 캐리 람의 퇴진을 요구하며 ‘검은 대행진’에 나섰다. 주최 측 안내에 따라 검은 옷을 입은 시민 수만명은 도심에서 홍콩 사람들에게 저항의 상징인 ‘우산’을 펼쳐들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코즈웨이베이와 완차이, 홍콩 입법회가 있는 애드미럴티 일대 도로를 점령했고, 이 지역 교통은 마비됐다. 시민들은 “악법 폐지” “우리를 죽이지 말라” “학생들은 폭도가 아니다”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었다. 시위대 중 어린이와 초등학생도 다수 보였다. 시민들은 또 전날 밤 정부 청사 인근 쇼핑몰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 추락사한 30대 량모씨를 추모했다.
이번에도 시위가 격화되자 캐리 람은 시민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캐리 람은 이날 성명을 내고 “정부의 업무가 혼란을 일으켰다는 점을 인정한다”며 “모든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시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문제를) 개선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캐리 람은 15일 오후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대만 정부가 살인범 인도를 요청하지 않고 있어 범죄인 인도 법안이 더는 긴급하지 않다. 법안 추진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법안 철회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홍콩 정부가 송환법 추진을 보류한 것은 대규모 시위에 대한 부담과 미·중 무역전쟁 영향 우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오사카 G20 정상회의 회담 등을 의식한 조치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한정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선전에 직접 내려가 캐리 람 장관에게 법안 연기를 지시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캐리 람 행정장관의 지지 기반인 친중파와 재계까지 등을 돌리고 대화를 강조한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번 법안에는 중국 법원이 본토에서 발생한 범죄와 관련 홍콩 내 자산 동결 및 압류를 명령할 수 있는 조항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 법이 통과되면 부자들에게 홍콩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다.
캐리 람은 시위를 ‘폭동’이라고 규정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다가 역풍을 맞은 바 있다. 특히 캐리 람은 지난 12일 “아이의 버릇없는 행동을 방치하면 아이가 커서 ‘그때 왜 꾸짖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이라며 이른바 ‘어머니론’을 주장해 비난을 자초했다. 14일에는 6000여명의 어머니들이 홍콩 도심에 모여 “어머니는 강하다” “천안문 어머니회가 되고 싶지 않다”고 외치며 강경 진압을 비난했다. 한 어머니는 기타를 들고 무대에 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눈길을 끌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