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조선 피격사건 미스터리… 아베 외교는 망신살

입력 2019-06-17 04:06
중동 오만만에서 13일(현지시간) 피격 당한 유조선에서 불길과 검은연기가 치솟고 있다. 사진은 이란 ISNA통신이 제공한 것이다. ISNA·AP뉴시스

호르무즈해협 인근 오만해에서 13일(현지시간) 발생한 유조선 피격 사건의 배후 실체를 놓고 일본이 애매한 상황에 빠졌다. 미국은 유조선 공격 주체가 이란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은 오히려 미국을 향해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요구하는 형국이다.

글로벌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미국 편을 들어 왔던 일본이 미국 주장에 반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더욱이 피격당한 유조선 두 척 중 한 척인 ‘고쿠카 커레이저스호’는 일본 해운회사 고쿠카산업이 운영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유조선 공격 주체가 이란이라고 주장하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미국 측에 요청했다고 교도통신이 16일 보도했다.

일본이 이처럼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는 이유는 오만해에서 유조선이 피격될 당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과 이란 간 이른바 ‘중재 외교’를 위해 이란을 방문 중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총리 관저 관계자는 교도통신에 “일본은 이란의 공격이 사실일 경우 중재에 나선 아베 총리 체면이 크게 손상될 수 있고, 또 중대한 사안이기에 사실 확인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입장을 미국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미국과의 중재에 나서겠다며 아베 총리가 야심찬 이란행을 결행했는데, 정작 이란이 일본 유조선을 공격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아베 총리는 큰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7월 시작되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외교력을 과시하려던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된 상태다.

아베 총리는 당시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하메네이를 면담했었다. 하메네이는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메시지를 들고 온 아베 총리에게 “이란은 미국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국은 사건 이후 계속 이란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미국은 사건 발생 4시간 후 이란 경비정이 유조선에 접근하는 모습이 담긴 흑백 영상을 증거로 제시했다. 미국은 이란 군인들이 유조선 공격에 쓰인 기뢰 중 불발탄을 제거하는 것을 P-8 초계기로 촬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쿠카산업은 배를 공격한 것이 어뢰나 기뢰가 아니라 하늘을 날아온 포탄이었다고 반박했다.

국제사회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채 긴장된 분위기만 이어가고 있다.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EU) 등은 미국이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중국은 미국과 이란이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EU는 “최대한 충돌을 자제하고 도발을 피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도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라”는 입장이다. 이란과 사이가 나쁜 영국만이 미국 편에 서서 이란을 비판했다.

유조선 공격 사실을 부인한 이란도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다. 이란 정부는 16일 프런트 알타이르호 선원 23명을 두바이로 보냈다. 러시아와 필리핀, 그루지야 출신인 이들은 대부분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프런트 알타이르호 선원들은 사건 직후 상선 현대 두바이호에 구조됐다. 하지만 이란 군용 보트들이 나타나 선원들의 신병을 넘겨받았다.

고쿠카 커레이저스호와 프런트 알타이르호는 아랍에미리트(UAE)의 항구에 정박했다. 프런트 알타이르호에 이어 미 군함이 구조한 고쿠카 커레이저스호의 선원 21명도 배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피격당한 유조선 두 척이 모두 UAE 근해에 정박하면서 구체적인 사건 경위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