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용 감독은 지난 4월 20세 이하(U-20) 남자 축구대표팀 소집 당시 U-20 월드컵을 앞두고 세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상대보다 1.5~2배 이상 뛸 수 있는 체력,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상대에 딱 맞는 전술. 이 세 가지는 대회가 진행될수록 서로 맞물리며 ‘원팀’ 정정용호의 위력을 배가시켰다. 특히 상황에 따른 유연한 전술 변화, 용병술은 정 감독이 왜 ‘제갈용’이라는 별명을 얻을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이번 대회에서 만개한 정 감독의 맞춤형 전술과 용병술은 12일(한국시간) U-20 월드컵 준결승 에콰도르전에서도 여지없이 통했다. 조별리그 3경기와 일본, 세네갈과의 토너먼트에서 수비에 방점을 찍었던 것과 달리 이날은 전반부터 공격에 비중을 뒀다. 포르투갈, 아르헨티나가 포함된 조별리그와 토너먼트에서 강팀을 상대하기 위해 전반에 움츠러들었다가 후반에 전력을 집중하는 전략에서 변화를 준 것이다.
선수 구성에서도 상대의 허를 찔렀다. 이날 미드필더로 선발 투입된 고재현(대구) 김세윤(대전)은 앞선 5경기에서 출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고재현이 첫 경기 포르투갈전에 선발 출전했다 교체된 것을 제외하면 선발 출전 경험도 없었다. 김세윤은 아르헨티나전 후반 24분에 교체 투입된 것이 전부였다. 정 감독은 경기 후 “고재현 김세윤 선수를 넣은 후 한쪽으로 몰아 함정을 파고 난 다음 그쪽으로 프레싱(압박)을 가하려고 했다”며 “거기에서 볼을 탈취해 (이)강인이한테 연결만 되면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전반 39분 이강인(발렌시아)의 프리킥에 이은 최준(연세대)의 득점 후에는 수비를 두껍게 가져가며 잠그기를 시도했다. 대회 전부터 갈고 닦았던 ‘선수비 후역습’ 전술로 돌아간 것이다. 후반 28분 이번 대회에서 키 플레이어 역할을 하는 이강인을 과감하게 빼고, 박태준(성남)을 넣은 것도 수비에 무게를 둔 변화였다. 수비에 비중을 두긴 했지만 공격 자원인 조영욱(서울), 엄원상(광주)을 투입해 상대 뒷 공간도 계속 노렸다. 엄원상은 후반 41분 스피드를 이용해 돌파한 후 상대 골 네트를 갈랐으나 오프사이드가 선언돼 아쉬움을 남겼다.
앞선 경기에서도 정 감독의 전술은 변화무쌍했다. 같은 경기에서도 전·후반이 달랐고, 선수 움직임도 수시로 바뀌었다. 이는 선수들의 높은 전술 이해도, 선수들 간 호흡 없인 불가능한 것이다. 정 감독은 “지난해 챔피언십(2019 아시아축구연맹 U-19 챔피언십) 때 전술노트를 나눠줬다”며 “선수들이 조직적으로 뭘 해야 할지 알고 있고, 월드컵 와서는 경기를 통해 더 발전시켰다”고 설명했다. 전술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상대가 전술 변화를 예측하고도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가게야마 마사나가 일본 감독은 16강 패배 후 “상대의 변화를 인식하면서 전·후반에 대응했지만 득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수비에 비중을 둔 전술을 뒷받침하는 체력 역시 대회 전 일정 수준에 도달했다. 정 감독은 대회 개막 직전인 지난달 23일 인터뷰에서 “어제 선수들 최종 테스트를 시켜 보니 체력적인 부분에선 유지가 아니라 상승했다”며 “데이터상으로 나타난 게 있으니 선수들이 자신감을 보이고 전술에서도 시너지 효과가 났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8강 진출 상대 중 체격과 스피드가 가장 좋다는 평가를 받은 세네갈을 상대로 전·후반 90분, 연장전 30분을 소화한 끝에 4강에 진출한 것도 체력의 뒷받침 없인 힘든 일이었다.
전술과 체력에 날개를 달아준 마지막 퍼즐은 자신감이다. 정 감독은 대회를 앞두고 4강 진출이 목표라고 했으나 선수들은 우승을 공언했다. 감독보다 높은 목표를 스스럼없이 밝힐 수 있었던 건 선수들이 그만큼 서로를 믿고, 코치진을 신뢰한다는 방증이다. “선수들이 대회 자체를 즐겼으면 한다”고 말한 정 감독의 지도 방침 역시 선수들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배경이 됐다. 실제 대표팀은 포르투갈과의 첫 경기에서 패했을 때나 세네갈전에서 선제골을 허용했을 때도 위축되지 않았다. 에콰도르전 이후 선수들이 정 감독의 머리에 생수를 부은 것도 평소 정 감독의 선수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