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사진) 한국은행 총재가 “통화정책은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해 나가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간 “기준금리를 인하할 때가 아니다”고 일관했던 이 총재임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변화로 풀이된다. 시장에선 현재 1.75%인 기준금리가 사실상 연내에 인하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이 총재는 12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한은 창립 69주년 행사를 갖고 기념사를 통해 ‘적절한 대응’을 언급했다. 그는 “최근 미·중 무역분쟁, 반도체 경기 등 대외요인의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졌다”며 “시나리오별 정책운용 전략을 수립해 적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역대 한은 총재들은 통화정책이 큰 배의 키를 다루는 일과 같다고 비유해 왔다. 방향을 틀더라도 조금씩 세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총재의 달라진 ‘발언 수위’는 사실상 기준금리 인하를 예고한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 총재는 불과 2주 전인 지난달 31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에는 “기준금리 인하로 대응할 상황이 아니다” “(금통위원의 인하 소수의견도) 시그널은 아니다”고 했었다.
이 총재의 코멘트는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2가지 불확실성인 ‘미·중 무역분쟁’ ‘반도체 경기’를 두고서도 보다 분명해졌다. 이 총재는 2주 전에는 무역분쟁을 두고 “한치 앞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이날은 “우리 예상보다 어려운 쪽으로 가는 것 같다”고 비교적 우려를 명확히 했다. 2주 전 “수출물량의 증가폭이 확대되는 개선 움직임도 포착된다”던 반도체 경기에 대해서는 “예상보다 회복 시기가 지연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고 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 총재의 ‘적절한 대응’ 발언 직후 “전체적으로 통화정책의 완화적 기조로 가는 데 접근하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중앙은행의 정책에 대해 말을 아끼던 기재부가 ‘완화’를 언급하자, 시장은 경제정책 최고위 관계자들의 발언이 맞춰져 있다고 풀이했다. 대신증권의 경우 이날 점심 무렵 ‘이제 한국 기준금리는 1.50%’라는 보고서를 투자자들에게 발송하기도 했다.
애초부터 상당수 해외 투자은행(IB)은 미·중 무역분쟁이 심화하면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시기가 빨라질 수 있다고 관측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부과 선언 이후 중국 인민일보가 “싸우고 싶지 않으나,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보도하는 등 두 나라의 갈등은 거세지고 있다.
세계 경기가 ‘먹구름’으로 묘사되는 상황에서 각국 중앙은행은 잇따라 완화 기조로 돌아섰다. 이달 들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까지 ‘적절한 대응’이라는 표현과 함께 기준금리 인하를 시사하고 나섰다. 파월 의장의 발언은 기준금리 인하가 가계부채 문제, 부동산 투기 문제로 연결될 것을 우려해온 한은의 정책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준 것으로 보인다. 금융투자업계는 이르면 3분기 중 금리가 내려갈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