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인격으로 차별받지 않고 사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페미니스트였다.”
고(故) 이희호(사진) 여사는 한국 사회에 남녀 차별이 만연해 있을 때부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만으로 남녀 대결의 장이 펼쳐지는 지금보다도 몇 발자국 앞서 있던 셈이다. 일상적 불평등에서 사회문제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여성운동의 맨 앞줄에는 그가 있었다.
한 사회의 언어 관습은 불평등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이 여사는 여성 차별적 호칭들을 문제 삼았다. 자서전 ‘동행’에서 그는 “나는 유독 ‘그녀’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남’은 없는데 왜 ‘그녀’라고 하는지. 이는 일본어 ‘가노조’에서 온 일제 문화의 잔재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전쟁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화냥년, 양공주, 정신대 등의 호칭에서부터 드러난다고 봤다. 남성이 전쟁에서 조건 없이 칭송받는 것과 정반대인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6·25전쟁 때는 남성 중심의 대한청년단에 소속되기보다 별도의 여자청년단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여학생이 거의 없던 대학 시절, 여성들에게 ‘고개를 들라’고 주문한 것도 이 여사였다. 빈 교실을 찾아다니며 도시락을 먹고, 술자리에서 배제되는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보라”고 외쳤다. 기독교 여성운동 단체인 YWCA 활동을 하면서는 만연한 축첩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 ‘첩 둔 남편 나라 망친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등 문구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이 여사는 ‘김대중의 아내’로만 남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내를 조력자가 아닌 동지로 대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동교동 집에 부부 문패를 단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에서 “(부부 문패를 단 건)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다”라고 했다.
1971년 대선 당시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연단에 섰다. 당시만 해도 후보 부인이 연단에 서서 연설하는 모습이 생소할 때였다. 이석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여사는 87년 대선 때도 연단에 서는 것을 말리던 비서진에게 ‘지금은 여성이 마이크를 들어야 하는 시대다. 나는 나라를 위해 마이크를 든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김 전 대통령 임기 때는 장관 임명장 수여식 때 부부 동반으로 임명장을 받는 새로운 문화도 생겼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에도 이 여사는 여성 권익 향상에 목소리를 냈다. 미투운동이 터져나왔던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는 “남성들은 여성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어떻게 여성들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지 너무 화가 난다”며 “용기 있게 나서는 걸 보면 좋다. 대견하고 고맙다.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서전에서도 그는 “민주주의의 발전만큼 여성들은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행복하다”고 했다.
심희정 김성훈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