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놓고 한·일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양국 학자와 언론인들이 모여 양국 관계를 진단하고 해법을 논의했다. 양측의 상황 인식은 약간 달랐다. 일본 측은 한국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체제가 뿌리째 흔들려 해결 방안이 보이지 않는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 비관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반면 한국 측은 위안부에 이어 징용까지 그동안 덮어뒀던 문제들이 다 노출됐으니 해결만 하면 진정한 한·일 관계 발전이 가능하다는 낙관론을 폈다.
지난 7일 일본 도쿄 게이오대에서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한일미래포럼, 게이오대 현대한국연구센터가 공동 주최한 제7회 한·일 언론인 심포지엄에 참석한 일본 인사들은 현지의 반한(反韓) 분위기가 심각하다고 입을 모았다. 프리랜서 기자인 아오키 오사무는 “현재 일본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은 거의 혐한(嫌韓) 일색”이라며 “거기에서 한국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면 엄청난 기세로 항의가 온다”고 말했다.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장으로 근무하다 지난해 본사로 귀임한 나카지마 켄타로 기자는 “일본 정부 관계자들 중 한국을 파트너로 생각하는 사람이 줄었다”고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고미 요지 도쿄신문 편집위원은 “(문 대통령에 대해 일본 언론들이) ‘반일·친북’이란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이걸 부정할 수 있는 재료가 없다”며 반일·친북을 부정할 만한 행보를 보여 달라고 했다. 아와쿠라 요시카쓰 교도통신 기자는 “타협은 양보라는 요소를 내포하는데, 문 대통령의 사고방식으로는 징용 등 과거사 문제로 일본 정부와 정치적 타협을 도모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이전 대통령 3명(노무현·이명박·박근혜)은 대일관이 뚜렷하지 않아 임기 중에 한·일 관계가 냉온탕을 오갔는데 문 대통령은 ‘피해자 구제’ 인식이 확고해서 일절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시즈오카현립대 오쿠노조 히데키 교수는 65년 청구권협정 체제를 친일·보수 세력이 과거사 문제를 도외시하고 밀어붙인 것으로 여기는 한국 일각의 인식에 우려를 표시했다. 징용 이슈에 대해 오쿠노조 교수는 “한국이 명확한 입장을 밝혔으면 좋겠다”며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면서도 양국 분쟁의 씨앗을 해결하는 역할을 정치가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 측은 역공을 폈다. 청와대 경제보좌관을 지낸 김현철 서울대 일본연구소장은 “문재인정부는 과거사는 관리하면서 신동북아체제에 한·일이 미래지향적으로 협력하자는 투트랙 전략을 계속 요구했는데 아베 신조 정권은 철저하게 원트랙으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추규호 한일미래포럼 대표(전 주영대사)는 “이달 말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한·일 양자회담이 없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호스트(주최국)가 안 하겠다고 하는 건 외교관 하면서 들어보지 못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현재의 갈등 상황이 오히려 긍정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배종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모른 척 덮어두고 시간만 보내온 사안들이 지금 와서 터지는 것”이라며 “미래에는 더 이상 불거지지 않도록 논의해야 할 때이며, 한·일 관계의 후퇴라기보다 진정한 발전의 기회”라고 말했다. 이명찬 게이오대 방문연구원도 “까발려진 문제들이 지금 해결되면 앞으로 한·일 관계는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양국의 10, 20대는 피해의식 없이 상대국에 호의를 갖고 있으니 현 상황은 어찌 보면 ‘지나간 세대들의 마지막 결투’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참석자들은 양국의 언론보도가 서로에 대한 반감을 부추겨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지적에는 대체로 공감했다. 이케하타 슈헤이 NHK 국제보도 앵커는 “짧은 말로 상대를 규정하는 게 편하고 재미있어서 많이들 하는데, 미디어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한국은 이렇다, 일본은 저렇다고 단순화시키는 데서 나오는 오해들이 갈등을 필요 이상으로 증폭시킨다”고 지적했다.
도쿄=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