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 한가운데 끼어 있는 한국 기업들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미국과 중국 시장 모두 놓칠 수 없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올해 5월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 459억1000만 달러 중 중국(110억7400만 달러)과 미국(65억2200만 달러)이 차지하는 비중은 40%에 육박한다. 두 나라 중 하나라도 놓치게 되면 경제가 아주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 한국 기업들은 가장 큰 두 시장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 편을 들자니 중국이 ‘제2의 사드 보복’에 나설 것이 우려된다. 반대로 중국 편을 들면 미국에 보이콧당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암묵적인 요구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선택하라는 압박을 해오는 게 한국 기업들을 더욱 난감하게 한다. 재계 관계자는 9일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중국과 미국 모두 우리에겐 중요한 시장”이라며 “비가 지나가길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반도체, 통신 등 IT 분야는 미국과 중국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입장이 곤란해지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이 ‘IT 냉전’ 양상을 띠면서 반도체, 통신장비 등이 핵심 분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지금은 화웨이만 특정해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향후 다른 중국 기업으로 확대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자칫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화웨이뿐만 아니라 샤오미, 오포, 비보 등 다른 중국 업체도 고객으로 두고 있는 만큼 섣불리 미국 제재에 적극 동참하기는 어렵다.
일반 소비재 관련 기업들도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 특히 사드 보복 이후 다시 한류 바람이 불면서 실적이 좋아지고 있는 화장품, 의류 분야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으로 영향을 받는 건 없지만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 사드 보복 때와 같은 타격이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중국 수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간재도 걱정이다. 중국을 거쳐 미국이나 유럽으로 향하는 물량이 줄어들면 중간재를 중국에 수출하는 한국 기업들도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글로벌 경제 전반의 침체를 불러오는 것도 걱정거리다. 양국 갈등에 직접 개입되지 않는 기업이라도 글로벌 경기가 안 좋아지면 수요가 줄어 실적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