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생명줄 특허 보호 못하면 혁신은 불가능”

입력 2019-06-09 19:18
박원주 특허청장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특허가 보호받지 못하면 혁신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최종학 선임기자

한국은 특허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내는 나라다. 국내총생산(GDP) 대비는 물론 인구 대비 특허 출원이 세계 1위다. 특허의 중심은 중소기업이나 개인이다. 대기업(17%)보다 많은 42%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특허로 버는 돈은 적자다.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허 소송을 내 이겨봤자 소송비용도 못 건진다. 그래서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으로부터 특허를 침해받아도 소송을 내지 않는다.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기업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내도 자꾸 침해를 당하다 보면 특허를 낼 동기가 사라집니다. 이대로 놔두면 한국은 혁신성장을 할 수 있는 모멘텀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박원주 특허청장을 최근 특허청 서울사무소에서 만났다.

-특허에 대한 처벌을 강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까지 한국은 다른 나라 기술을 베껴서 성장했다. 우리가 다른 나라 기술을 베껴야 하는 입장이어서 특허 침해에 대한 처벌을 강하게 하는 법을 만들 수 없었다. 소위 패스트팔로어 딜레마다. ”

-지금은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나.

“특허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경쟁력이다. 특허를 많이 내고 있는 중소기업들을 보호해줘야 한다. 이제 대기업들도 중소기업 특허를 제값을 주고 사야 한다. 대기업들이 해외에서 사업을 하면서 특허 괴물들의 공격을 받아 한 번에 1조원씩 빼앗기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는 특허 시장과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한국 산업의 근저가 튼튼해진다.”

-특허를 통한 성장이 가능한가.

“한국의 경제 성장은 토지·노동·자본을 바탕으로 일을 많이 해서 이룬 양적 성장에 불과하다는 해외 석학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양적 성장을 혁신이나 기적으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효율적인 질적 성장을 할 때가 됐다. ”

-질적 성장을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나라 연구·개발(R&D) 투자액은 세계 5위이고 GDP 대비 세계 1위다. 그러나 R&D를 통해 축적된 지식과 기술이 배타적 권리를 통해 보호되지 않으면 질적 성장에 한계가 있다. 국내외에서 특허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포뱅크라는 회사가 1998년 모바일 문자투표 특허를 냈다. 하지만 다른 회사들이 다 베꼈다. 지금은 전 세계가 이 기술을 이용해서 문자투표를 하고 있다. 매출이 연간 3조원이다. 해외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특허를 냈다면 로열티로 연간 1조원을 벌수 있었는데 한 푼도 못 가져오고 있다.”

-결국 특허 보호가 중요한가.

“우리 기업이 아무리 획기적인 것을 만들어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다. 나에게 기술과 특허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특허를 선택하겠다. 남들이 모두 베껴 쓸 수 있는 기술은 기술이 아니다. 배타적인 권리를 가진 기술, 특허로 보호받는 기술이어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 출원된 특허기술 가운데 해외에 출원되는 것은 11%, 이 가운데 중소기업 특허기술은 4%에 불과하다.”

-특허 침해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법을 개정한 것도 이 때문인가.

“특허소송에서 이겼을 때 한국의 중간값은 6000만원이다. 미국은 중간값이 65억원이다. GDP 차이 등을 감안해도 너무 차이가 크다. 우리나라는 소송에서 이겨도 소송비도 못 건졌다. 오는 7월부터 특허 침해 시 손해액의 3배까지 배상하는 제도가 시행된다. 특허 침해로 얻은 이익 전액을 손해로 간주한다. 지난 3월 산업재산권 특별사법경찰도 출범시켰다. 전문가들이 특허, 영업비밀, 디자인 침해 범죄까지 수사한다. 중소·벤처기업의 지식재산을 강하게 보호하는 것은 혁신성장과 공정경제 실현과도 관련이 있다. 중소·벤처기업들이 지식재산을 기반으로 독일의 히든챔피언 같은 강소기업이 될 수 있도록 해외에서 특허를 내는 것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마지막 공직생활을 이런 일들에 불살라 보려 한다.”

-최근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미국에서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데.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소송을 낸 이유는 한국에서는 이겨봤자 얼마 못 받으니까 그러는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도 특허를 강하게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하루빨리 갖춰야 한다.”

-13일 한국에서 미국 유럽 일본 중국이 참여하는 지식재산 선진 5개국(IP5) 회의가 열리는데 핵심 주제는.

“4차 산업혁명을 어떻게 특허로 품어 안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지금은 이미 있는 기술을 모으는 융합기술 시대다. 각각은 새로운 기술이 아닌데 한데 모으면 새로운 기술이 된다. 이 융합기술에 특허를 주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융합기술을 심사할 별도 조직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특허 인력이 부족하다. 미국은 8000명, 중국은 1만명이 넘는데 특허 강국이라는 우리는 860명밖에 안 된다. 일은 많고 보수는 적어 사기도 떨어져 있다. 주요 7개국(G7)에서 특허 성장률이 1% 포인트 증가할 때 1인당 GDP 성장률은 0.6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미래를 위해 건강한 특허 생태계를 조성하고 특허 인재를 키워야 한다.”

산업부서 잔뼈 굵은 산업정책통

행정고시 31회로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잔뼈가 굵은 에너지·산업정책통이다. 1964년 전남 영암 출신으로 송원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학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학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력자원부 사무관, 지식경제부 산업경제정책관에 이어 산업부에서 대변인, 기획조정실장, 산업정책실장, 에너지자원실장을 두루 거쳤고 청와대 산업통상자원비서관도 역임했다. 산업정책 전반에 정통한 관료로서 산업분야 업무 전문성과 풍부한 행정경험, 조직관리 역량과 소통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지난해 9월 임명됐다. 지식재산의 창출과 권리화, 활용, 내실 있는 보호를 통해 기술혁신과 산업발전에 기여할 적임자다. 온화한 성품으로 선후배 사이에서 신임이 두텁다.

신종수 논설위원 js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