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표현주의 창시자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미국 추상표현주의 대가 윌럼 데 쿠닝,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 알렉산더 칼더, 포스트모더니즘의 서막을 연 미국 작가 로버트 라우센버그,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회화를 확장한 독일 작가 게르하르 리히터, 생존 작가 중 가장 고가로 작품이 거래되는 영국의 데이비드 호크니….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20세기 서양미술사 대가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다.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작가들의 전시가 상업갤러리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7월 1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영국 런던에서 미술 자문회사인 LVH를 운영하고 있는 큐레이터이자 컬렉터인 수잔 앤 로렌스 반 하겐의 컬렉션 중 엄선된 32점으로 구성됐다.
전시 제목 ‘픽처 플레인: 수직, 수평의 화면과 움직이는 달’은 회화 제작이 캔버스를 이젤에 세워두고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캔버스를 바닥에 두고 그리는 잭슨 폴록 식 추상표현주의 방식으로 바뀐 미술사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그만큼 이번에 전시된 작품이 미술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는 의미다.
전시의 첫머리는 키르히너의 1919년 작 ‘얕은 욕조 안의 두 소녀’(67억7000만원)가 장식했다. 전후(戰後)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강렬한 색채, 거친 선, 왜곡된 형태로 드러내고자 했던 표현주의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면서 가장 고가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 뒷면에는 또 다른 작품이 그려져 있어 궁금증을 자아낸다.
한쪽 벽면에 즐비하게 걸려 있는 게르하르 리히터의 추상 회화를 보는 것도 눈의 호사다. 표현주의적 형식을 띠는 서정적 추상화와는 다른 기하학적 추상화인 ‘25색’도 이채롭다. 그는 독일 쾰른대성당 복원 때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작업을 주문받았는데 이때 영감을 얻어 스테인드글라스를 회화로 표현한 연작 중 하나이다.
침대 시트를 캔버스처럼 세우고 거기에 물감을 바른 작품으로 미술계를 놀라게 했던 라우센버그가 1970년대 그린 부랑아 시리즈 중의 하나인 ‘파란 부랑아’도 나왔다.
천 조각에 특수용액을 묻혀 잡지에서 오린 이미지가 묻어나게 한 뒤 이걸 퀼트처럼 짜깁기한 작품이다. 이웃 가족의 초상화라는데, 회화이면서 회화가 아닌 묘한 경계에 있는 이른바 ‘콤바인 페인팅’으로 그는 미술사에 획을 그었다.
칼더의 조각도 움직이는 조각(모빌)과 움직이지 않는 조각(스태빌)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요즘 서울시립미술관 서울관의 회고전으로 장안의 화제인 호크니의 회화 ‘거의 스키 타듯이’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스타일의 작품이다. 무대미술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으로 끊임없이 변신하고자 하는 대가의 부단한 노력을 훔쳐볼 수 있다.
수잔 앤 로렌스는 지난달 말 방한해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시장에 맞게 대형 작품보다는 소품 위주로 선정했다”면서 “미술관이 아닌 상업갤러리에서 전시하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홍콩 바젤아트페어 기간이 낀 지난 3월 홍콩의 페더빌딩에서 자신들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연 기획전 ‘왓츠업(What’s up)’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