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국빈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3일(현지시간) 선물한 것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쓴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의 초판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받은 초판본은 특별히 금박 장식과 미국 국기 색깔의 표지로 장식됐다.
이튿날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처칠 전 총리가 타자기로 직접 친 ‘대서양 헌장’ 초안을 선물했다. ‘대서양 헌장’은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8월 14일 처칠 총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영국 군함 프린스오브웨일스호에서 회담한 후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2차 대전 후의 세계평화 등에 관한 양국 정책의 공통원칙을 기술한 것으로 유엔의 이념적 기초가 됐다.
여왕과 총리가 극진한 환대와 함께 약속한 듯 처칠 관련 선물을 건넨 이유는 무엇일까. 트럼프 대통령의 방문이 마침 2차 대전 승리의 분수령인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 기념식과 맞물리기도 했지만 영국의 속내가 짐작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4일 선물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영·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2차 대전 이후 양국이 구축한 세계질서를 지키도록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1940∼45년 영국 총리를 지낸 처칠은 연합군의 2차 대전 승리를 이끈 인물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나치 독일에 굴복한 후 처칠은 끊임없이 미국의 참전을 타진했다. 미국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참전을 결정한 것은 전쟁의 방향을 바꿨다. 처칠은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을 여러 차례 만나 영·미 연합군의 전략을 세웠다. 처칠은 1963년 영·미동맹을 공고히 만든 공로로 ‘미국 명예시민권’을 받았는데, 미 정부가 외국인을 명예시민으로 인정한 첫 사례다.
영국 왕실과 정부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간 처칠 전 총리를 상기시켜 트럼프 대통령에게 동맹의 가치를 역설했다. 특히 미국이 그동안 기여해온 자유세계의 질서를 훼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동맹국들을 공격하고,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비판하고 있어서다.
마침 트럼프 대통령은 처칠을 존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안에 처칠 동상이 처음 놓였다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 다시 원위치시켰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앞서 국빈만찬 연설을 통해 “2차 대전에서 함께 희생한 후 영국과 미국은 다른 동맹국들과 협력해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제기구들을 만들었다”면서 “세계는 변했지만 어렵게 획득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국가들이 협력해야 한다는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의 메시지에 기존 입장을 바꿀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양국 언론의 분석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