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조국, 비행기에 실려간 아이들

입력 2019-06-08 04:05
입양을 기다리는 아기가 한 자원봉사자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과거 저 아기와 같은 처지에 있던 영아 상당수는 미국 가정에 입양됐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아리사 H 오는 “한국 아동 입양 이야기는 어떻게 냉전의 국제 정치가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국내 문제이자 집안 문제가 되었는지 보여준다”고 말한다. 뉴시스

한반도 허리에 휴전선이 그어진 뒤 한동안 대한민국 창공에는 희한한 비행기가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기 비행기”라고 불렀다. 이유는 그 비행기가 한국 입양 아동을 미국으로 실어 나른 전세기였기 때문이다. 1956년 12월부터 61년 12월까지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주도로 아기 비행기에 실려 미국으로 건너간 아기는 약 2000명에 달한다.

당시 아기들은 두꺼운 흰색 마분지로 만든 상자에 누워 이역만리 떨어진 미국으로 향했다. 전세기는 2700m 이상은 날 수 없는 기종이어서 자주 낮은 고도로 비행해야 했다. 난기류를 만날 때가 많았다. 아기들은 멀미를 했다. 비행 도중 숨을 거둔 아기도 있었다. 57년 3월 전세기에 동승한 누군가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당시의 비행은) 귀청이 터질 것 같은 울음소리, 귀통증, 메스꺼움, 구토, 설사, 더러워진 옷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사랑과 정치가 만난 자리

전세기를 이용해 입양될 아기를 단체로 미국으로 옮긴 것, 바로 이 풍경은 해외 아동 입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이런 방법을 고안해 한국 아동 입양의 끌차 역할을 했던 주인공은 홀트양자회를 세운 미국인 해리 홀트(1905~1964). 농부였던 그가 입양에 뛰어든 건 55년 한국의 혼혈아 12명을 미국으로 데려가면서부터였다. 그의 활동은 순식간에 미국에 알려졌다. 홀트는 이듬해 한국 아동 211명을 미국인 가정에 입양시켰다. 그에게 이 일은 선교 사역이었다. 홀트가 남긴 이런 기도문만 봐도 알 수 있다.

“주님이 직접 이 일을 시작하셨고, 이 일을 완수하고 계신 분도 주님이시다. …사람들은 우리가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편 118편 23절을 인용할 뿐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홀트가 입양 분야에서 거둔 “중요한 혁신”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전세기 활용이며 둘째는 대리입양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전세기 활용은 대규모 입양 사업을 가능케 만들었다. 미국에 있는 예비 양부모는 대리입양을 통해 한국에 오지 않고도 아기를 입양할 수 있게 됐다. 지금으로 따지면 구매 대행 서비스 비슷한 걸 입양 분야에 도입했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의 아동 입양 역사에서 한국은 가장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국가다. 미국에서 해외 아동 입양이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건 한국전쟁 이후부터였다. 전쟁 이후 한국이 외국에 보낸 아동 15만명 가운데 3분의 2는 미국인이 입양했다. 95년까지 한국은 미국에 아동을 가장 많이 입양 보낸 나라였다. 그렇다면 왜 미국인들은 한국 아이를 원했던 걸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미국인이 가장 입양하고자 했던 아기는 금발의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이런 아이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출생률이 떨어지고, 낙태가 이뤄지고, 피임 기구 사용이 늘고, 미혼모가 직접 아이를 키우는 일이 많아지면서 “아기 가뭄”은 심각해졌다. 75년 자료를 보면 미국인이 백인 영아를 입양하는 데 걸린 시간은 3~7년이었다.

하지만 한국 아이는 달랐다. 쉽고 편하고 빠른 입양이 가능했다. 일단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런 것일 게다. 한국 아동을 원하는 미국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초기 입양 부모들의 특징은 이랬다.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나이는 중년인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백인 보수주의자였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피부색이 다른 아이를 입양하려고 한 건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의 저자는 그 이유로 “기독교적 미국주의”를 꼽는다. 기독교적 미국주의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기독교 정신+광범위한 책임 의식+가족이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냉전 시기에 미국 언론은 한국전쟁을 기독교인(남한)과 공산주의자(북한)의 싸움으로 소개했다. 미국 백인 보수주의자에게 남한 아동을 자식으로 끌어안는 일은 “기독교적 민주주의의 대의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반공활동”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아시아의 충성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미국 백인의 인종적 관대함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십자군 운동”이자 “선교 사역”이었다. 입양 관련 시설이나 언론은 입양을 가없는 인류에 대한 미국인의 사랑으로 포장하기 위해 부모가 있는 한국 아동을 천애고아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입양의 “낭만적 서사”를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그 시절 한국 고아가 미국에서 “최고의 이민자”였다고 말한다. “체제 전복의 위험이 있는 성인 난민이나 성적으로 위험한 전쟁신부와 달리, 장래가 촉망되는 한국 아동은 핵가족과 미국이라는 국가 가족의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이민자였다.”

입양, 대한민국의 국책 사업

아리사 H 오 지음, 이은진 옮김/뿌리의집, 404쪽, 1만9000원

‘왜 그 아이들은…’를 펴낸 아리사 H 오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현재 미국 보스턴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됐다. 한국 아동 입양의 초기 역사를 들려주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혼혈아 문제로 뻗어 나간다. 그러다가 한국 아동 입양이 한국과 미국의 사회복지사들에게 끼친 영향을 면밀히 살핀다. 미국과 한국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각각 들여다보는 내용도 등장한다. 책의 부제처럼 “해외 입양의 숨겨진 역사”를 확인케 만드는 신간이다.

서울올림픽이 막을 내린 뒤인 88년 12월 14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값싼 자동차와 텔레비전으로 유명해지기 전, 한국은 고아들로 유명했다.”

얼마간 과장된 보도일 거라 여기겠지만 저 보도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한국 독자로서는 대한민국이 왜 그렇게 많은 아기를 미국으로 보냈을까 궁금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동 입양은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요술봉과도 같았다. 해외 입양은 한국 정부로서는 “돌볼 수 없거나 돌볼 생각이 없는 아동을 외국으로 치우는 통로”나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해외 입양은 한국 근대화의 중요한 요소였다”며 “남아돌고 원치 않는 아동을 외국으로 빼돌린 덕분에 한국은 자원 대부분을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입양을 “남아도는 한국 아동을 해외로 내보내는 압력 밸브”로 규정하거나, “허술한 사회복지 정책과 아동복지 정책의 보충제”라고 표현한 대목도 만날 수 있다.

실제로 산업화 시절 한국의 아동 복지는 형편없었다. 아동 유기도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60년대엔 매년 4000명 넘는 아기가 버려졌고, 64년에는 그 숫자가 1만1000여명까지 치솟았다. “빈곤층 가정보다는 고아원이 더 부유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한국의 아동 입양 시스템은 현재 세계 곳곳에 자리 잡았다. 이른바 “해외 입양 복합체”는 “선한 의도”로 이 일에 임하고 있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다. 저자는 “(현재의 입양 시장은) 아동을 상품화하고 공급하고 꾸러미처럼 외국으로 실어 나르는 장터가 되었다”고 적어놓았다.

그렇다고 해외 아동 입양을 무조건 비판하는 내용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 문제를 더 깊숙하게 들여다보고, 세세하게 분석하고, 가감 없이 그 역사를 알려야 한다는 데 있다. 이 밖에도 이 작품엔 흥미로우면서도 각별한 의미를 띠는 이야기와 통렬한 메시지가 수두룩하게 실려 있다. 번역도 훌륭하다. ‘왜 그 아이들은…’를 읽은 독자라면 올해 연말 이 작품을 ‘올해의 책’ 가운데 한 권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게 만들고 입양 시스템의 이면을 확인케 해준다. 뜨겁고 단단한 책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